> #blog-writing # 적(敵) 며칠 전, 문지방을 넘다 벌레를 발견했습니다. 아니죠, 제가 벌레를 찾고자, 아니, 보고자 하는 어떠한 조금의 의지도 없었으므로 벌레가 출현했다고 해야겠습니다. 아니, 이 녀석들은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니 벌레가 출몰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문지방 위로 벌레가 출몰했습니다.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다리가, 다리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언뜻 보면 수챗구멍의 거름망에 엉긴 머리카락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지간히 흐린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36시간쯤 밤을 지새운 뒤 12잔째의 커피를 챙기러 부엌으로 나가다 반쯤 감긴 눈으로 흘깃하고 보지 않는 이상, 그조차도 벽지의 무늬와 커피 얼룩을 전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덩한 상태가 아닌 이상, 그게 어지럽게 엉킨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곳, 좁은 곳, 높은 곳, 깊은 심해, 점프스케어, 광대, 뾰족한 날붙이, 혈관주사조차도 겁내지 않는. 그러나 강인 해서라기보단 단지 그것들이 자아내는 공포의 장르에 그다지 감응하지 않는 저를 단 1초 만에 압도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벌레입니다. 그들이 해충인지 익충인지, 육식성인지, 맹독성인지 따위의 캐릭터적 특징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그로테스크한 생김새로부터 아주 1차원적이면서도 즉각적인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죠. 대체 무엇이 그토록 무서운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마디마디가 분절되어 있는 얄팍한 다리, 키틴질의 껍데기 안쪽에 거꾸로 차올라있을 근육과 혈액과 배설계, 그 악몽 같은 생존의 구조로 만들어내는 끔찍한 동작들까지. 모든 요소가 저의 혐오 센서를 건드리고 온몸의 모근에 전기충격을 일으켜 털을 세웁니다. 기억이 나는 최대치의 시점부터 불과 몇 달 전까지의 평생 동안, 저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것들을 직접 마주하여 제압하는 일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전혀요. 벌레가 출몰하면 그와 동시에 온몸에 스턴이 걸려 마비된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거든요. 한 마리의 벌레가 눈에 들어온 그 즉시 모든 공간이 벌레로 우글거리는 환영이 현실을 덮어쓰고, 저는 그 안에 갇혀 뜬 눈으로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벌레를 잡아줄 때까지 말이죠. 엄마, 아빠, 오빠, 친구, 썸남, 때로는 경비아저씨, 인터넷 설치기사님이요. 이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지 않았던 인물은 나만큼이나 벌레를 무서워하던 썸남이었습니다. 사실 벌레를 잡아주지 못하는 것 말고도 잡고 싶지 않은 이유는 많았지만요. 이 글을 빌어 그 썸남에게 다시 한번 총체적인 thumbs down을 보냅니다. * * * 어찌 되었건, 저는 벌레와의 공생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상상할 수 없다'는 건 공포의 단계에 고여있는 문장입니다. 상상이란 자고로 스스로의 의지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능동적인 행위임에도, 거기에 공포에서 기인한 '할 수 없다(Cannot)'가 붙는 순간, 그 주도권을 박탈당하고야 맙니다. 벌레와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것조차 너무나 두렵고 끔찍해서, 뇌가 셔터를 내려버리는 수동적 방어 조치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되풀이되는 셧다운 조치에 너무나도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요. 어느덧, 벌레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영겁회귀는 저의 어두운 이면(Dark Side)을 자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를 계속해서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던 공포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낯선 힘(Force)에 놀란 저는 수련하는 마음으로 트레드밀 러닝에 정진하고(월간 마일리지 60km), 말차를 마시고(최소 30잔), 책(950페이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제다이(Jedi)의 수련과는 궤가 달랐습니다. 저의 정진을 추동한 것은 강박과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해도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1999)* 의 아나킨 스카이워커처럼 말이죠. 요다 마스터는 그에게 일찍이 포스의 어두운 면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 [!quote] > *"공포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 > (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and hate leads to suffering.)* 또한 그의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에게도 같은 경고를 했습니다. > [!quote] > *"분노, 두려움, 공격성... 그것들이 어둠의 면이다. 일단 어둠의 길로 들어서면, 그것이 영원히 네 운명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Anger, fear, aggression. The dark side are they. Once you start down the dark path, forever will it dominate your destiny.)* 요다 마스터의 메시지는 한결같았습니다. 외부의 적이 무서운 게 아니라, 마음속의 두려움이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 것이라는 점이었죠. 하지만 아나킨은 요다의 경고를 무시하고 끝내 다크 사이드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다스 베이더가 되었습니다. 루크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함정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굴레를 끊어내고 올바른 포스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제 문지방을 딛고 선 저가 선택할 차례였습니다. 그동안 저는 끊임없이 벌레로부터 도망쳐왔습니다. 놈들이 나타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온몸이 꽁꽁 굳은 채 누군가 대신 구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두려움은 나를 나약하게 만드는 족쇄였고, 굴욕적인 날들이 무한히 되풀이되었습니다. 지난날을 되뇔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부서지고, 그 자리에 서늘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단 숨에 턱 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요동치자 검은 살의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들은 적(敵).**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생활권 내에서 확실하게 사멸시켜야만 하는 숙명의 적, 운 좋게 살아남아 어디론가 은둔하였다는 열린 엔딩 따위는 허락될 수 없는 필살의 적. 그들은 나에게 적이다! 저 끔찍하고 징그러운 생명체를 눈앞에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찰나의 공포에 육신과 영혼을 저당잡히지 않으리라. 벌레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자비란 없으리라. 기필코 저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것, 존재론적인 소멸을 선사하리라! 그와 동시에 내 안의 다른 무언가가 심연 속으로 서서히 숨을 거두는 중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려 떨던 과거의 나였습니다. 아아, 저는 이미 어둠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나약한 나에게 심심한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제 이 공간의 지배자는 온전히 내가 된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광선검 대신 살충제를 뽑아 들고 나직이 내뱉었습니다. ***"I have you now."***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1978) 중* `치--이ㅣ이이이이익----------치익잋칙치칯치----익칙칙칙치이----ㅣㅣ이이이치------익치익치이ㅣ이이이-------------익치이이------이익익잋---------------------------칙치칯치익-------칙칙칙치이ㅣㅣ이` * * * 며칠 전, 문지방을 넘다 살아있는 벌레를 발견했습니다. 아니죠, 제가 그 살아있음을 인정하고자 하는 어떠한 의지도 없었으므로 벌레가 이미 죽어있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아니, 이 녀석들은 죽은 상태 조차도 인정할 수 없으니, 태어난 적도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벌레가 없었는데, 여전히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크사이드의 포스(Force)를 택한 F-킬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