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모든 이야기는 실화이거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 1
수능이 끝난 어느 추운 겨울날, 이제 학교를 떠날 일만 남은 열아홉 욘킴과 여고생 친구들은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병약한 외모와 그로부터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유머 감각으로 컬트적 인기를 끌던 지리 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뭐 해야 돼요?"
지리 선생님은 30초 정도 깊게 고민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올바른 화장법을 연구하는 것도 괜찮겠지."
아이라인을 관자놀이까지 그리던 맨 앞자리 친구가 문득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다. 등록금도 벌고, 올바른 화장법을 연구하려면 올바른 화장품이 필요하니까요. (그때 당시 올바른 화장품이란 MAC이었습니다.)
-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픈부터 마감까지 근무. 시급 얼마. 점심 미제공.
음, 그렇군. 별 고민 없이 백화점 아르바이트에 지원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8층의 라코스테 매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아침 공기를 마시며 잠을 깨고, 버스를 타고 내렸습니다. 아직 셔터를 올리지 않은 백화점 정문을 지나 화물차 주차장의 뒷문으로 들어서면, 일명 '직원 동선'이라 부르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는, 직원들만 다니는 통로 같은 것이었는데요. 좁다랗고 긴 통로에는 박스와 헐벗은 마네킹, 바퀴 달린 옷걸이가 즐비해 있었습니다. 패션쇼의 백 스테이지 같은 모습이었달까요.
돌이켜보면, 백화점 건물은 일종의 실린더 같은 구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기둥 바깥을 둘러싼 2m 정도 너비의 공간은 직원용 통로, 그보다 안쪽의 심지가 매장인 셈이지요. 백화점 안에 창문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쇼핑을 하는 손님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려는, 일종의 다크 심리학을 반영한 설계라기보다는요.
아무튼, 통로에서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도착하면 매니저 언니가 입출고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지런했습니다. 항상 누구보다도 먼저 출근했습니다. 늘 1등이면서도 늘 완벽한 메이크업과 보풀이 한 개도 일지 않은 말끔한 스웨터 차림이었습니다. 마치 매일 아침 숍을 다녀오기라도 하듯이요. 나는 그런 그녀를 속으로 은근히 존경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에겐 그녀가 완벽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그녀의 총애를 받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매장에서 부지런히 매대를 진열하고, 거울을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뒤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일찌감치 출근하여 평소와 같은 완벽한 모습으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일찍 왔냐며 나를 반겼습니다. 참깨 다이아가 반짝거리는 그녀의 손목시계가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나는 그녀를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더욱더 커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대체 몇 시에 출근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며칠 텀을 둔 후에 이번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략 아침 6시나 6시 반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불을 다 켜두지 않은 직원 통로는 군데군데 어두웠고, 통로를 따라 즐비한 마네킹들이 어둠속에서 심각할 정도로 불길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통로에 띵- 하며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공포영화 클리셰 그 자체였습니다. 매니저 언니의 총애를 받으려면 아무도 없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누구라도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속으로 '산골짜기 다람쥐'(무서울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르면서 무서운 마음을 힘겹게 억눌렀습니다.
8층에 도착하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매장이 있었습니다. 이번엔 기필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완벽한 메이크업과 보풀 하나 없는 스웨터 차림의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퍼뜩 나를 발견하더니, 활짝 웃으며 오늘은 왜 또 이렇게 일찍 왔냐고 반겨주었습니다. 그 완벽한 립 라인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시간은 넉넉 잡아도 6시 반이었고, 그간의 점심시간 대화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는 대략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정성들인 완벽한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코디라는 뜻)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4시부터 깨어 있었으리란 계산이 섰습니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백화점 8층에서 홀로 장부를 보고 있던 그녀. 나에게 아르바이트인 이곳이 그녀에겐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섵불리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쯤 되니 그녀보다 일찍 출근하기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보통 7시 30분쯤 출근하여 스피커에서 틀어주는 국민 체조 노래에 맞춰 다 같이 체조를 하고 나면. 아,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우리는 매일 출근 조례라는 것에 참여했습니다. 각 매장의 직원들이 에스컬레이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어디선가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나타나 판매율과 실적에 대해 15분 정도 지도 편달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판매율이 부진한 매장의 매니저를 콕 찝어 훈계하고, 실적이 좋은 곳에는 대놓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모두를 격려하는 차원이라 말했지만 그야말로 적나라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표정 없이 팔을 붕붕 휘두르고, 허리를 구부렸다 펴며 체조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상당히 기괴한 광경이지만, 그땐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영혼 없는 체조를 하는 와중에도 매니저 언니는 허투루 하지 않았습니다. 두 팔은 쭉쭉 뻗었다 접고, 완전히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며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체조조차도 정석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순수하게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줄곧 무언가를 정석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멋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헬스장에서 정석적으로 트레드밀을 달리는 사람은 멋있습니다. 운전을 할 때 정석적으로 숄더 체크를 한다든지, 정석적인 포맷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횡단보도 정지선을 한 치도 넘어서지 않고 서 있는 뒷모습은 멋있습니다. 분리수거의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눈을 맞추며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태도는 한결같이 멋있습니다. 그녀의 정석적인 체조 동작이 그랬습니다. 순수하게 멋졌습니다. 나는 옆에서 막연한 동경을 느끼며 같은 방향으로 팔을 쭉쭉 뻗었습니다.
체조가 끝나면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모두가 한목소리로 세 번 외쳐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여기까지 마치고 나면 다들 약간은 고조되었달까,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곤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사기 증진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 2
지금의 나는 상냥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여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열아홉의 나는 매사에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순수한 미소로, 진심을 다해 상냥하게 굴었습니다. 세상도 그런 나를 친절하게 대해줬습니다. 단언컨대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을 정도였으니까요. 세상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중이었습니다.
씩씩한 행진곡과 함께 백화점 문이 열리면 체험 삶의 현장이 시작되었고, 나는 최선을 다해 옷을 팔았습니다. 얼굴엔 상냥한 미소를 띠고요. 하지만 그런 미소로도 극복할 수 없는 요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월요일이었습니다. 월요일은 주말 사이 이성을 잃고 쇼핑했던 고객 중 절반가량이 다시 이성을 되찾고 반품이나 환불을 하러 오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체조의 에너지가 슬슬 떨어질 무렵, 그날도 어김없이 환불 부대가 등장했습니다. 라벨을 뜯어 올이 풀린 스웨터, 정체불명의 얼룩이 묻은 소매, 영수증 없이 "내가 분명히 여기서 샀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핑크색 등산복 아주머니, 창고의 수많은 S 사이에서 XS 찾아내기, 아래층 수선실에 '뛰지 말고 얼른' 다녀오기, 도레미파솔 중 '솔' 음으로 "(솔) 카드 취소 영수증 드릴까요?", "(솔) 주차하셨을까요?"라고 묻기 등등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정신을 추슬러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매장이 워낙 바빴기 때문에 점심은 보통 교대로 먹었습니다. 매니저 언니가 먼저, 그다음은 둘째 언니, 마지막으로 나와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무도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없을 정도로 바빴습니다. 매니저 언니는 계산대 뒤에서 온갖 골치 아픈 결제를 처리하느라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둘째 언니는 내내 환불 손님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 언니는 매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5분에 한 번씩 태풍이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어질러진 옷들을 정리하느라 쉴 새 없이 분주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매대 정리를 좋아했습니다. 흐트러진 옷들을 착착 개서 왼쪽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순서로 배열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빠도 그 일만큼은 허투루 하지 않았습니다. 칼각으로 접힌 옷 위에서 '캬아-' 하고 빨간 입을 벌린 통통한 악어 자수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보고 있는 모습은 묘한 쾌감을 주었습니다.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최정예 악어 부대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기분마저 좋아지곤 했습니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이 옷 저 옷을 만지고 들춰보는 탓에 악어 부대의 오와 열은 5분마다 한 번씩 뒤죽박죽 흐트러졌지만, 오히려 끊임없이 정리할 것이 생겨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나의 쓸데없는 정리 강박이 빛을 발하는, 그야말로 적성에 꼭 맞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고객님!"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한창 정리에 열을 올리던 그때, 둘째 언니가 앙칼지게 소리쳤습니다. 적어도 10분 넘게 환불 고객과 대치 중이었는데, 결국 사달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S/S 신상품인 녹색 피케 셔츠의 소매를 접다 말고 언니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핑크색 계산기를 두드리던 매니저 언니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니, 여기 뭐가 묻어 있다니까요. 여기 보세요, 여기."
둘째 언니가 크림색 크루넥 울 스웨터를 들어 올리며 소매 끝을 가리켰습니다. 보드랍고 포근한 감촉이 좋아 매대를 정리할 때면 은근슬쩍 여러 번 만지작거리던 옷이었습니다. 소매에 무엇이 묻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매니저 언니 다음으로 존경하는 둘째 언니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습니다.
"아니, 아가씨. 살 때부터 있었던 거를 그렇게 말하면 돼?"
양쪽 끝이 뿔처럼 뾰족하게 솟은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아주머니가 쏘아붙였습니다. 오른팔에 낀 빨간 장바구니 손잡이 사이로 크고 싱싱한 대파 한 단이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그 파릇파릇한 녹색과 강렬한 빨간색의 대비는 어쩐지 우리가 팔고 있는 악어 로고를 연상시켰습니다.
"아니, 살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요, 고객님. 그러면 사실 때 말씀을 하셨어야죠."
"아니, 이것 보세요 아가씨. 파는 사람이, 응? 그걸 갖다가, 샅샅이 살피고서는 줬어야지 말이야, 응?"
"아니, 고객님, 이런 게 처음부터 있었으면 불량이어서 저희가 애초에 팔지를 못해요."
"아니, 아가씨 아무리 환불을 해주기가 싫어도 그렇지, 어머 나 참 기가 막혀서 정말, "
"아니, 고객님, 저희가 환불을 해드리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요."
"아니, 아가씨, "
"아니, 고객님, "
두 사람의 팽팽한 "아니" 핑퐁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초접전 테니스 랠리처럼 이어졌습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어쩐지 팝콘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대파 아주머니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나는 속으로 '둘째 언니 이겨라' 하며 간절한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한 한 느릿느릿 녹색 피케 셔츠를 개면서 말이죠. 어느새 피팅룸을 정리하던 아르바이트생 언니도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와 함께 셔츠를 개고 있었습니다. 그 언니는 셔츠 개는 일을 끔찍이 싫어했는데도요.
대파 아주머니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매니저 언니가 금전출납기를 ‘찰칵’ 하고 닫더니 계산대 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나와 아르바이트생 언니, 그리고 초록색 악어 부대의 시선은 일제히 매니저 언니를 향했습니다. 그녀의 공정한 심판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매니저 언니는 둘째 언니를 어깨로 가볍게 밀어내며 크림색 크루넥 울 스웨터를 홱 낚아챘습니다. 그러고는 완벽한 립 라인의 입꼬리를 활짝 끌어올리며 말했습니다.
"에이 이 정도는 당연히 환불해 드려야지? 자! 고객님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세요."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대파 아주머니의 완승이었습니다. 매니저 언니가 어머, 호호, 깔깔 웃으며 대파 아주머니와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동안, 둘째 언니는 매대에 어질러진 크루 넥 울 스웨터 위에 두 주먹을 올려놓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접었던 녹색 피케 셔츠를 펼쳐 처음부터 다시 개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생 언니는 벌써 세 번이나 단추를 채웠다 끌르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대파 아주머니는 한참을 더 웃고 떠들다가 '요 앞 시장에서 대파가 한 단에 2천 원'이라는 정보를 남기고는 매니저 언니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떠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매니저 언니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는 사이, 둘째 언니는 어디론가 거친 발소리를 내며 사라졌습니다.
매장이 잠시 한산해지자, 매니저 언니는 나와 아르바이트생 언니에게 다가와 금색 신용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배고프지? 먼저 밥 먹고 와. 이걸로 계산하고."
나의 마음속에서 그녀가 영웅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도 매장은 여전히 한산했고, 둘째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전화를 하던 매니저 언니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며 신용카드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주름 하나 없이 꼼꼼하게 칠해진 빨간 입술로 '어, 그래.'라고 소리 없이 벙끗거리며 카드를 받아 들었습니다.
(응, 응, 어. 어. 그러니까. 어. 어. 아니 애가 나이가 몇 갠데. 뭐, 하루 이틀 일 해? 그때 그 언니네 매장에서도 그래 가지고 잘린 거를 내가. 어? 아니, 아니, 거기 말고, 그 왜, 있잖아. 어어어어. 거기 거기. 아, 나 진짜 답답해 죽겠어 계집애가. 아니, 일 못하면. 아니, 몇 년째 못해? 계속 못해? 뭐 평생 못할 거야? 하다못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이건 알바가 낫다. 아니, 알바가 낫다니까? 어. 응응. 어어. 안 바빠 지금. 어, 말해. 어, 그래 가지고?)
나는 매대 뒤에 서서 질서 정연하게 접힌 옷들을 만지작거리며 매니저 언니의 속닥거리는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속닥거리긴 했지만 사실상 대놓고 내뱉는 목소리였으므로 안 들으려야 안 안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길어지는 통화를 듣고 있자니 슬슬 둘째 언니의 행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휴게 시간이랄 게 따로 없었기에, 나와 아르바이트생 언니는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직원 통로로 들어가 거기서 눈치껏 쉬곤 했습니다. 마침내 차례가 왔고, 나는 늘 그랬듯 화장실 앞에서 슬쩍 방향을 틀어 직원 통로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바퀴 달린 행어들 사이 박스를 깔고 앉아 울고 있는 둘째 언니를 발견했습니다.
당시의 나는 분명 상냥한 열아홉 살, 졸업을 앞둔 여고생이었습니다만 지금의 나만큼 타인의 감정을 관조적으로 헤아릴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가의 괴로움이나 눈물 같은 건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하다못해 TV로도 보고 싶지 않은 당혹스럽고 난처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덩달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되면서도, 정작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즐비한 마네킹들 사이에서 일단 마네킹인 척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둘째 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쿨쩍) 내가 물어줘야 해. 내가 또 물어줘야 한다고. (쿨쩍)"
그녀는 연신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었는데, 내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했습니다. 다가가 무어라 위로를 건네기에는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습니다. 마네킹들 사이에서 "하하, 짜잔!" 하고 나타났다가는, 언니가 발작하며 바퀴 달린 행어를 걷어찰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 마네킹인 척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른팔을 90도로 구부린 채 미동도 않는 메서드 연기를 펼치면서 말입니다.
그때 누군가 직원 통로의 문을 벌컥 열었고, 둘째 언니는 황급히 코를 닦으며 일어나 반대편으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그 틈을 타 문이 닫히기 전 살금살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매장은 다시 북적거렸고 매니저 언니는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나는 얼른 매대 뒤로 돌아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악어 부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빨간 입을 벌리고 있는 악어들이, 어쩐지 평소와 달리 사악하고 탐욕스러워 보였습니다.
# 3
어느덧 저녁 8시 30분. 종일 서 있느라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지끈거릴 무렵, 애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기다리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오늘도 저희 백화점을 찾아주신 고객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매대에 덮개를 씌운 뒤, 왼오오왼오왼왼오로 뒤죽박죽 된 옷걸이를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정돈한 뒤, 박스와 비닐을 정리하여 직원 통로에 내다 두면 비로소 마감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매장 안에는 둘째 언니와 매니저 언니 사이의 견딜 수 없이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벗어난 나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퇴근길에 올랐습니다.
몹시 피곤해서 샤워도 제대로 못 하고 저녁마저 거른 채 침대로 파고들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은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자니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교차했습니다. 빨간 장바구니 위로 삐져나온 초록색 대파, 매니저 언니의 새빨갛고 완벽한 입술과 똑같은 방향으로 ‘캬아-’ 하고 붉은 입을 벌린 악어 부대, 그중 한 마리가 올라간 울 스웨터를 입고 쿨쩍거리며 울고 있던 둘째 언니.
그날 밤, 나는 커다란 악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당구공만 한 눈만 내밀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버스를 타고 내린 뒤, 악어가 그려진 사원증을 목에 걸었습니다. 헛둘헛둘 시작된 아침 체조 시간. 매니저 언니는 평소보다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팔을 뻗었고, 앉았다 일어나야 하는 파트에서는 무릎을 굽히는 시늉만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삼세번 복창마저 립싱크로 때웠습니다. 정석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힐끔거렸지만, 어딘지 근심 어린 표정을 제외하면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체조가 끝나자 그녀는 경쾌한 행진곡에 맞춰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따라 어디론가 총총 사라졌습니다.
그날도 매장은 손님들로 북적였습니다. 나와 아르바이트생 언니는 루돌프 사슴뿔 머리띠를 쓰고, 초록색 악어가 수놓아진 빨간 V넥 니트 스웨터를 차려입은 채 옷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매대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피케 셔츠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전구처럼 알록달록 우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배경음악 삼아 도레미파 '솔', 한 톤 높인 목소리로 활기차게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솔) 어서 오세요!"
"(솔)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아마 8층에서 가장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은 우리 매장이었을 겁니다.
한편, 둘째 언니는 흰색 케이블 크루넥 카디건을 입었고, 머리띠도 쓰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도 유니폼으로 유독 흰색 제품을 즐겨 입던 그녀였기에, 어쩌면 담담하게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항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툼한 꽈배기 무늬의 하얀 카디건은 마치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눈 덮인 트리 같아서, 오히려 매장의 크리스마스 무드를 더 효과적으로 완성해주고 있었습니다. 자꾸만 어제의 쿨쩍거리던 모습이 겹쳐 보여 조금은 서글픈 크리스마스 같았지만요. 그녀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악어도 어쩐지 평소보다 더 작고 위축되어 보였습니다. 나는 자꾸만 그 악어로 향하는 눈길을 애써 거두며 분주히 옷을 개고 종종걸음으로 손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아가씨?"
우아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방금 필드에서 돌아온 듯한 정석적인 투피스 골프웨어 차림의 아주머니였습니다. 봄을 연상시키는 파스텔 톤의 가볍고 세련된 핏. 가슴팍엔 작은 강아지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나는 그게 요크셔테리어였다고 확신합니다. 이 한겨울에 이토록 가벼운 차림이라니, 짐작건대 그녀의 차 뒷좌석엔 야생동물 25마리 정도의 목숨이 들어간 두툼한 모피 코트가 걸려 있었겠지요.
그녀의 아우라는 묘했습니다. 그러니까, 차림새만으로는 언더파(Under par)지만, 실제로는 9홀에서 이미 60타를 넘긴 절망적인 점수로 동IN 그늘집에서 76학번 동창들과 참나물버섯육전을 나눠 먹으며 "오늘 운동 제대로 했다!"라고 즐겁게 깔깔거릴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진지한 골프라기보다는 일종의 잔디를 밟으며 하는 계모임인 셈이지요. 그래서일까 그녀에게서는 우아하면서도 묘하게 친근한 구석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언니가 여기서 이걸 샀다는데, 바꿀 수 있어요?"
골프웨어 아주머니, 아니 사모님, 아니 아주모님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의 그녀는 영수증과 함께 분홍색 윈드재킷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재질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빨간 입을 쩍 벌린 악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품 카탈로그를 모두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일단 윈드재킷을 받아 들고 택과 라벨을 확인하였습니다.
"아, 고객님. 이건 저희 브랜드 옷이 아니네요."
그러자 그녀는 마치 길 잃은 어린양을 바른길로 인도하듯, 우아하게 말했습니다.
"으응? 아니에요. 여기 악어 있잖아요, 악어."
나는 묵직한 금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초록색 악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야위고 순하게 생긴 악어가 라벨 위에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악어와는 뼈대부터 다른 녀석이었습니다. 자고로 '우리의 악어'라 함은 나일강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강메기 다섯 마리쯤은 순식간에 먹어 치우게 생긴 악어였습니다. 몸통부터 꼬리, 앞뒤 다리까지 복스럽게 두툼한 모습으로, 오른쪽을 향해 캬악 하고 빨간 입을 쩍 벌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뭐랄까, 마치 항상 오른쪽에 먹잇감이 있는 것처럼요. 나는 '우리의 악어'가 수놓아진 피케 셔츠를 직접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그, 고객님. 보시면 저희 악어는 보시다시피 좀 싸납게 생겼거든요. 얘는 착하게 생겼고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으응? 어머! 그러네?"라며 신기한 듯 감탄하더니, 우아하게 '호호호'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녀는 크로커다일 레이디는 7층에 있다는 나의 안내를 주의 깊게 듣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귓가에 호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을 느끼고 있던 찰나, 뒤에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뭐가 싸나워?"
매니저 언니였습니다.
# 4
첫 출근을 이틀 앞둔 날, 나는 전당포와 호박 나이트클럽, 그리고 핑크색 하트가 그려진 성인 전화방이 한데 모인 낡은 건물로 교육을 받으러 나갔습니다.
물걸레로 대충 문지른 듯 얼룩진 계단을 올라 3층에 다다르면, 형광등 불빛이 가냘프게 깜빡거리는 복도가 나타났습니다.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유리문을 지날 때면, 웬 헐벗은 변태 아저씨가 사채업자들의 주먹을 피해 뛰쳐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교육장은 그 유리문들 중 하나였습니다. 전단지를 잡아 뜯은 자리에 파란 글씨로 <OO백화점 교육장>이라 적힌 A4 용지가 붙어 있었죠. 특별한 의도라기보다는 프린터에 검은색 잉크가 떨어졌을 때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파란색 같았습니다. CMYK 중 K값이 0일 때, 한국인의 정서상 빨간색은 금기인 데다 노란색은 눈에 띠지 않으니, 아마 차선책으로 파란색을 택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교 교실처럼 익숙한 공간에 모르는 언니, 오빠, 아저씨들이 듬성듬성 앉아 휴대전화를 보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누구도 눈을 마주치거나 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이 이곳의 암묵적인 룰인 듯했습니다. 았습니다. 나는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앉아 교육이 시작되길 기다렸습니다.
8시 59분, 젊은 여자 한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습니다. 몸에 딱 붙는 검은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옆구리엔 초등학생용 작은 실로폰을 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9시 정각이 되자마자 지체 없이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육 내용은 대체로 친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친절하게 인사하기, 친절하게 웃기, 친절하게 말하기. 상냥함이 몸에 배어 있던 열아홉의 나는 적어도 이 과목만큼은 누구보다 월등히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특히 ‘친절하게 말하기’ 시간에는 발성 수업이 포함되어 있어, 평소 좋아하던 음악 시간을 떠올리며 더욱 집중했습니다.
젊은 여자, 여기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칠판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러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일제히 정면을 향해 악어처럼 입을 ‘악-’ 하고 벌렸습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입을 벌린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경쾌한 동작으로 실로폰의 ‘솔’ 음을 쳤습니다.
- (솔)
모두가 입을 벌린 채 실로폰 소리를 들었습니다.
- 자자, 도레미파솔, 솔, (솔)로 ‘아---’ 해보실게요.
- 아ㅏㅏ.
실로폰 소리가 잦아들 무렵 선생님은 다시 한번 같은 음을 두드렸습니다.
- 자, (솔). 길게, ‘아---’.
- 아ㅏㅏㅏ.
선생님은 한 번 더 같은 음을 치더니 큰 소리로 노래하듯 덧붙였습니다.
- 자, 다시. (솔), ‘아---’, ‘아---’, ‘아---ㄴ녕하세요?’
- 아ㅏㅏㅏㅏㄴ녕하세욧?
이 과정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뒷자리 아저씨가 기침을 하느라 흐름이 끊어질 때 까지요. 선생님은 실로폰 건반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소리를 죽였습니다.
- 좋아요! 다들 너무 잘하셨어요. 고객님께 말할 땐 어떻게 한다? 도레미파(솔), (솔). 아---, 안녕하세요? 목소리 톤이 높아질수록 활기차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답니다. ‘솔’은 가장 명랑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높이거든요. 도에서 미까지는 너무 낮아 무뚝뚝하게 들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솔을 넘어서 라나 시로 말하면 어떻게 들릴까요?
선생님은 이번엔 실로폰의 ‘시’ 음을 아까보다 힘 있게 내리쳤습니다.
- (시), (시)
- 아---, 안녕하세요? 어떻죠? 듣기 싫죠? 고객님들 귀가 어떻다? 아프다. 피곤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솔)로 인사합니다. 아시겠죠? (솔), (솔), 안녕하세요?
누군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시 건반을 붙잡아 소리를 죽이고는, 분명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강조했습니다.
- 여러분. 서비스업에서 목소리 톤, 중요합니다. 우리는 프로니까요. 우리는 뭐다? 프로다. 아마추어 아니죠? 프로는 목소리부터 프로페셔널하게. 아시겠죠? 자, 다시! 아---
- 아ㅏㅏㅏㅏ.
나는 그녀의 정석적인 교육 방식에 감탄하며 악어처럼 입을 벌린 채 몇 번이나 명랑한 (솔) 음의 "아---ㄴ녕하세요?"를 외쳤습니다.
“이 아가씨야, 뭐가 싸납냐고.”
매니저 언니의 목소리에 교육장에 가 있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습니다. 완벽하게 그려진 그녀의 빨간 립 라인은 광대뼈 쪽으로 한껏 올라가 있었지만, 평소 같은 상냥한 미소는 아니었습니다. 앞니를 꽉 맞물린 채 입 주변 근육을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죠. 억지스러운 인장력 때문에 볼살은 위로 밀려 올라갔고, 눈 밑의 얇은 피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말투보다 섬뜩한 것은 그 기괴한 부조화였습니다.
"어..."
말문이 막힌 나는 그대로 피팅룸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좁고 밀폐된 피팅룸 안에서 그녀는 나를 코너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기괴한 빨간 미소와 함께 (시) 음으로 질문 공세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얘, 여기 어디야? 응? 여기 어디야? 동대문이야? 시장바닥이야? 너 시장바닥에서 알바해? 아니지? 백화점이지? 백화점에서 싼마이로 손님 대하면 될까, 안 될까? 교육 때 안 배웠어? 써비쓰 뭔지 몰라? 써비쓰? 응? 한국말 몰라?"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잇새로 짓눌려 나왔고, 질문 하나에 한 번씩 구두 굽으로 바닥을 탁, 탁 쳤습니다.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가 메트로놈에 맞춰 스타카토로 비명을 지른다면 아마 이런 소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나는 '싼마이'가 정확히 무슨 뜻이고 어느 나라 말인지 알고 싶은 마음과, 써비쓰는 한국말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그녀의 얼굴 피부가 너무나 팽팽하게 땅겨져 있었고, 그럴수록 눈 밑의 경련은 더욱 심해졌거든요. 금방이라도 그녀의 완벽한 얼굴이 찢어지며 흉폭하게 생긴 악어 머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너 같으면 돈 쓰겠니? (탁) 응? (탁) 돈 쓰겠니? (탁) 응? (탁) 장난 같아? (탁) 응? (탁) 장난 같아? (탁)"
마음속으로 ‘산골짜기 다람쥐'(무서울 때 부르는 노래)를 읊조렸습니다. 첫 음을 (라)로 잡은 탓에 너무 높아진 산골짜기에서, 겁에 질린 아기 다람쥐가 필사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뻘건 입을 쩍 벌리고 네 발을 '탁, 탁' 거리며 쫓아오는 악어를 피해, 오솔길을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을 지나,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더 이상 바깥 하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날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척하며 직원 통로로 숨어들었습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얼굴 없는 마네킹들과 바퀴 달린 옷걸이들 뒤편의 구석진 곳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고 머리카락 얽힌 먼지가 굴러다니는 더러운 리놀륨 바닥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주저앉았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복합적이었습니다. 8층의 악어를 사납다고 말한 게 잘못인지, 7층의 악어를 착하다고 말한 것이 잘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동대문이라니, 시장 바닥이라니. 시장 상인들은 나처럼 친절하게 악어를 구분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요크셔테리어를 악어라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위협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말이죠. 억울함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나운 악어를 사납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귀여운 강아지가 귀엽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요.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대가로 좁디좁은 피팅룸에 갇혀 말 고문을 당해야 했다는 사실이 슬프다기보다 분했습니다. 매대 위에 두 주먹을 올리고 부들부들 떨던 둘째 언니,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훌쩍거리며 울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자 마음속에서 뜨거운 동질감이 일며 더욱더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억울함을 곱씹는 사이 내 안에서 낯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날 때부터 세상을 향한 호의로 가득했고 열아홉이 될 때까지도 계속해서 세상을 좋아하던 나의 천성. 착한 나. 친절한 나. 웬만한 일에는 화도 품지 않고 욕 한마디 해본 적 없던 상냥한 소녀의 표정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입술 꼬리가 양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올라갔습니다. 화들짝 놀라 얼굴에 힘을 주어 끌어내리려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입꼬리는 광대뼈를 향해 치솟았습니다. 맨얼굴의 피부는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졌고 눈 밑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아아, 정말이지 폭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주변이 순식간에 캄캄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하낫, 둘, 셋, 넷' 하는 체조 음악이 들려왔습니다. 듣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지만, 음악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음악이 들려오는 쪽에서 내가 동경하던 커리어우먼이 완벽한 립라인으로 웃으며 절도 있게 팔다리를 뻗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가죽이 조금씩 당겨지더니, 눈, 코, 입이 비틀어지며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관자놀이까지 단숨에 주욱-!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툴두툴하게 비늘 돋은 악어의 주둥이가 튀어나왔습니다. 악어가 빨간 입을 쩍 벌리자 남은 얼굴 가죽마저 머리 뒤로 좌악 벗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몸을 찢고 나온 악어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섰습니다. 짧고 통통한 두 다리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국민체조 음악에 맞춰 몸을 뒤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석적이지! 않은! 동작이었습니다!)
그 옆에서 "아---! 프로페셔널하게!"라고 외치던 젊은 여자 선생님의 검은 투피스도 쭈우욱 찢어지더니, 그 안에서 또 다른 악어가 뛰어올랐습니다! 빨간 입을 ‘캬-악’ 벌린 그 악어는 양손에 실로폰 막대를 들고 ‘시, 시, 시, 시’ 건반을 사정없이 딩동거렸습니다. 귀가 따갑고 피곤한, 진저리 나는 소리였습니다. 직원 통로는 어느새 듣기 싫은 실로폰 소리와 파충류 발바닥이 리놀륨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뒤섞인 불협화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이상한 생태계에서, 천성적으로 상냥하던 소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아, 이 좁은 통로 안에서, 좁디좁은 피팅룸 안에서 상냥한 소녀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짧고도 가혹한 시한부가 선고되었습니다. 똑. 딱. 똑. 딱. 손목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상냥한 나의 임종을 향해 가차 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제 점심시간 종료 1분 전입니다!
10초 전...!
5초...!
4초...!
3!
2!
1!
- **(솔) 썅년.**
이윽고 나는 루돌프 사슴뿔 헤어밴드를 쓰고 당구공만 한 눈을 굴리며 손님들을 노려보는 악어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아, 그녀는, 열아홉의 착하고 상냥했던 그녀는 기어이 싸나운 악어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 5
빨간 V넥 니트 스웨터에 루돌프 머리띠를 쓴 악어가 뾰족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습니다.
"(솔)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레♭) 살 거야?*
악어는 두 앞발을 가슴 앞에 공손히 모으고, 통통한 꼬리를 좌우로 씰룩거리며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 손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솔) 혹시 뭐 찾으시는 것 있으실까요?"
*(레♭) 빨리 사고 가버리란 말이야!*
그녀가 값비싼 캐시미어 스웨터를 만지작거리자 악어의 당구공만 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통통한 꼬리는 아까보다 더 크게 씰룩거렸습니다.
"(솔) 이 스웨터는 이번 시즌 신상품이랍니다!"
*(레♭) 비싸다는 뜻이지!*
그녀는 거울 앞에서 스웨터를 대본 뒤 잇새로 '습-'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악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짧은 뒷다리로 폴짝폴짝 뛰며 박수를 쳤습니다.
"(솔) 고객님은 하늘색이 참 잘 받으시네요!"
*(레♭) 무너져 내린 하늘이 있다면 말이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하늘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한쪽 팔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옷걸이 사이를 천천히 배회했습니다. 악어는 계속 꼬리를 씰룩거리며 그 뒤를 졸졸 쫓았습니다.
이번엔 그녀가 만지작거린 건 세일 중인 이월 상품 피케 셔츠였습니다. 그러자 악어는 씰룩거리던 꼬리를 내려놓고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어느새 아몬드 모양이 된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그녀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그 옆의 코튼 린넨 셔츠로 옮겨가자, 악어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습니다.
"(솔) 이 하늘색 스웨터 안에 레이어드 해서 입으시면 참 예쁘겠어요!"
*(레♭) 나라면 절대 그렇게 안 입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튼 린넨 셔츠도 챙겨 들었습니다. 악어는 다시 꼬리를 씰룩거리며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피팅룸에서 나오던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실수로 악어의 꼬리를 밟았습니다. 악어는 곧장 사납게 '캬-악!’ 하고 돌아보았습니다. 아르바이트생 언니는 머리털이 헝클어진, 겁먹은 다람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어는 그 모습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쯧!’ 소리를 내고는 다시 손님 뒤를 따랐습니다. 겁먹은 다람쥐는 매대 뒤로 쪼르르 도망쳤습니다.
어느덧 양팔에 옷을 가득 걸친 손님은 악어와 함께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입꼬리 끝까지 빨간 립스틱을 완벽하게 칠한 다른 악어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바코드 스캐너가 삑삑거리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삑) 29만 6천5백 원!
(삑) 17만 5천 원!
(삑) 7만 8천 원!
(삑) 13만 2천 원!
두 악어는 삑삑거리는 소리에 맞춰 리듬을 타듯 고개를 까딱거렸습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뒤뚱거리는 손님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그들은 기쁘게 외쳤습니다.
"(솔)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레♭) 호구가 따로 없군!*
밤이 되면 악어들은 답답한 유니폼과 명찰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습니다. 사람 목소리 대신 캬-악, 쉭쉬-익 하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면서 말이죠. 두 발로 위태롭게 서 있는 짓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가슴 앞에 공손히 모았던 짧은 앞발에서 갈퀴를 쫙 펼치고는 일제히 바닥으로 엎어졌습니다. 꽉 찬 모래주머니를 바닥에 메치듯 철퍼덕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리놀륨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수십 개의 발바닥이 분주히 찰싹거리며 직원 전용 뒷문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두 발로 서서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쫙 찢으며 정석적인 미소를 장착하였습니다. 꾀꼬리 같은 (솔) 톤으로 짹짹거리며 아부를 떠는 동안 (레♭) 톤의 기만이 뱀처럼 스르륵 새어 나왔습니다.
악어들은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나선형 실린더를 빙글빙글 오르내리며 헐벗은 마네킹들의 창백한 팔다리 사이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먼지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좁다란 통로에서 발바닥을 찰싹거리며 울고 웃고 비닐과 상자를 버렸습니다. 밤이면 다시 쉭쉭거리며 갈퀴를 펼쳤고 낮이면 두 발로 서서 활짝 웃었습니다.
*바코드가 삐빅삐빅, 금전출납기가 찰캉찰캉, 영수증이 바스락바스락!
"이번 정류장은 OO 백화점 앞입니다"
국민체조 시-작!
"어서 오십시오. 또 오십시오."
8층 악어 매출 점검!
송곳 같은 말들!
"(시) 시급에서 깔까?", "어린년이 말대꾸야?"
쉭쉭
송곳에 푹 찔린 자리에서 자존감이 동전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렸습니다.
"환불해 줘!", 프로페셔널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일제히 복창합니다. 자, 스마-일!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불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갈퀴 돋은 발로 버스 손잡이를 붙들고 들썩이는 어깨춤.
언제까지-어깨춤을-추게-할까요?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픈부터 마감까지!
등록금은 수백만 원, 시급은 4천 원, 점심은 미제공! 스-마-일!*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의 무한 루프를 따라 환멸이 자라났습니다. 눈물이 말라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부디 또 오십시오!"**
어느덧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목표 매출 200%를 초과 달성한 전설의 아르바이트생이 된 나는 마지막 유니폼이었던 울 폴로 칼라 스웨터를 피팅룸에 패대기쳤습니다. 완벽한 아이라인 언저리에 눈물 한 방울이 찔끔 맺힌 매니저 언니는 다음 방학 때 또다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건넨 뒤, 손님용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화장실 옆 ATM기에서 빳빳한 현금을 뽑아 들었습니다.
향수와 파우더 냄새가 진동하는 샤넬, 에스티 로더, 시세이도를 지나면 MAC 매장이었습니다. 나는 MAC을 그대로 통과해 백화점 정문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한 달간 한 번도 드나든 적 없던 그 문을 향해 곧장 걸었습니다. 육중한 유리문을 어깨로 힘껏 밀자, 막아서기라도 하듯 에어커튼의 뜨거운 바람이 슝슝 쏟아졌습니다.
지리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올바른 화장법은 MAC 립스틱이 아니었습니다. (레♭)의 환멸을 들키지 않도록 꼼꼼히 분장하는 일, 웃으면서 MAC 일 것. 그가 가르쳐주려던 것은 열아홉 소녀들이 나아갈 세상의 문법이었던 것입니다.
열풍을 뚫고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차가운 인도를 밟자마자 시릿한 겨울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던 텁텁한 옷 먼지가 순식간에 씻겨 나갔습니다. 저녁인데도 온 세상이 환했습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커다란 대파 한 단을 샀습니다. 정말 2천 원이었고, 알싸하고 파릇파릇한 녹색이었습니다. 시장 할머니는 거스름돈 8천 원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습니다. 커다란 대파를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마치 한 아름의 꽃다발 같았습니다. 아무런 말도, 도레미파(솔)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따스했습니다. 품 안에서 피어오르는 알싸한 대파 향에 코끝이 매웠습니다.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악어 꼬리처럼 길쭉한 발자국이 이어졌습니다.
- 싸나운 악어, 착한 악어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욘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