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 먼지 맛이 나는 삶은 이제 그만 먹겠습니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생일 케이크를 꺼냈습니다.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 지나간 아침이었습니다. 조각을 자른 나이프에 생크림이 듬뿍 묻어났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딸기가 후두둑 굴러 떨어졌습니다. 풍성하고 정직한 과일 케이크였습니다. 크림을 한 입 핥자마자 "음-!" 하는 감탄사가 자동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축하의 맛은 달콤했습니다. 음료로는 차가운 보리차를 곁들였습니다. 블랙커피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보리차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요즘 저는 커피를 멀리하려 애쓰는 중입니다. 잠을 깊이 자고 싶어서, 그리고 하루를 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무언가를 왜 하는지, 혹은 왜 하지 않는지에는 언제나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이유와 의식적인 노력이 함께하기 마련입니다. 케이크 한 편에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습니다. 최근 저는 소설을 많이 읽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페이지씩 신나게 허우적거리는 중입니다. 순전히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몸집을 불려 가며 더 큰 서사를 만드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소설 속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 일어나고, 주인공들은 언제나 뚜렷한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내 모든 걸 걸더라도 이곳만큼은 지켜낼 거야",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진실을 이제 세상에 내놓으려 해" 같은 결연한 문장들처럼 말입니다. 삶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 주인공의 의지를 움직이고, 그 시점부터 이야기는 생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삶도 본질적으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간 제 삶에는 현재를 근근이 서술하는 것 이상의 흥미로운 서사가 없었습니다. 내가 속한 곳이 곧 나의 세상이고, 돈을 버는 일이 나의 직업이며,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사회라는 진부한 설정으로 만들어진 '대체적으로 무난한' 서른여섯 개의 챕터가 현재까지의 삶이었습니다. 그날그날의 의식적인 노력이 모여있긴 했지만 실제로 열망한 것은 거의 없었고, 일기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에 가까웠습니다. 시럽에 절여진 딸기를 한 입 먹으며 '그래, 내 인생에는 이런 킥(Kick)이 없었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입안에서 딸기를 돌돌 굴리며 음미해 봅니다. 왜 맛있을까요? 이 독특한 산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맛의 핵심인 킥을 탐구하는 과정에는 호기심이 필요합니다. 제 삶에는 어떤 킥이 빠진 것인지 호기심을 가져보기로 합니다. "나는 왜 살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물어보니 답이 단박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살고 있다는 사실이 별문제 없이 성립하고 있었기에, 왜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탓입니다. 대체 왜 사는 것일까요?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케이크를 포크로 가르는 동안, 저의 의식은 삶의 눅눅한 이면으로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사는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끊임없이 주변을 겉돌며 살아야 합니다. 남들만큼 벌고, 주어진 만큼만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믿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미라는 문제에 한 번 눈을 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요.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삼키던 순간과 같이 말입니다. 삶의 맛을 만끽하고 있는가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원하던 맛이 맞는지 아닌지 끊임없이 묻지 않는 삶은 그저 그런 파운드케이크 같은 맛을 냅니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과일이 쏟아지는 화려한 생크림 케이크 대신, 퍽퍽한 먼지 맛이 나는 지루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삶은 무작위한 에피소드의 모음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온갖 지난한 사건들이 모여 서른여섯 번째 챕터와 서른일곱 번째 챕터 사이에서 케이크를 먹는 장면까지 저를 밀고 온 기적적인 서사니까요. 극적인 드라마는 아닐지언정 생생하게 살아있던 순간과 넋 나간 좀비처럼 죽지 못해 살던 순간이 버무려진 이야기이긴 합니다. 저는 생생하던 순간들을 떠올리려 애써 봅니다. 사랑하는 것, 열망하는 것들에 전념하던 몇몇 장면들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찰나였고, 타성에 젖어 있는 날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저는 지루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고집스러울 정도로 지루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지루함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내 삶은 적어도 파운드케이크 정도는 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말입니다. 포크로 남은 크림을 닥닥 모아 삼킵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달콤함이 마음의 문을 기분 좋게 두드립니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일단은 지루하게 살진 말자고, 맛있게 살자고 말입니다. 먼지 맛이 나는 삶은 이제 그만 먹겠습니다. 인생은 대충 먹어 치워버려야 하는 숙제가 아니니까요. 서른여섯 번째 챕터엔 이전에 없던 재미있는 킥을 더해봅니다. 예를 들면 이미 저질러버린 저의 퇴사 같은 것 말입니다. # Outgoing Links [Brunch: 먼지 맛이 나는 삶은 이제 그만 먹겠습니다](https://brunch.co.kr/@yonkim/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