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낭비란 없다 펜의 기능은 쓰는 것, 노트의 기능은 무언가 기록하는 것,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것, 귀마개는 소음을 차단하는 것과 같이 물건에는 각기 다른 본연의 기능이 있지요. 펜을 사놓고 무언가를 쓰지 않는다거나, 카메라를 사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찍지 않는 것은 기량을 뽐낼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들을 벤치에 마냥 앉혀 놓는 것과 같습니다. 아아, 나는 그것을 기능의 낭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는 기능을 낭비하는 물건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의하는 편입니다. 물건이 지닌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사용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기능의 낭비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는 소비 습관, 하나의 기능을 안심하고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는 퀄리티의 물건들로 조성한 환경입니다. 그러한 생활환경이란, 나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해 범위에는 스스로의 못 미더운 구석을 말끔하게 인정하는 것도 포함입니다. 이를테면 금액에 취향을 맞추려는 경향이라든지, 부주의한 탓에 물건을 잘 망가뜨린다든지, 서랍 안에 물건들을 처박아 두고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으로부터 학습한 신뢰할 수 없는 구석들 말입니다. 예전에 나는 마음속 청소기 위시 리스트의 1위 대신 구매한 값싼 버전의 청소기 먼지통을 비울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먼지통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이 잘릴 듯 말 듯 달랑달랑하게 매달린 먼지통 안 쪽의 머리카락을 긁어내느라 쓰레기통 앞에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30만 원 차이에 굴복한 대가는 끔찍했습니다. 또 하루는, 세 번의 외출 만에 굽이 부러진 짝퉁 구두를 신고 어기적거리며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아아, 그날은 공교롭게도 소개팅이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구두 탓이라 믿고 있습니다만, 아닐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남자가 어기적거리던 나를 영영 잊은 채 살아가고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조심스러운 성격 덕분에 물건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서랍 안은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열어보기 두려울 정도의 카오스가 되던 시절도 있습니다. 8년쯤 전, 이사를 하던 날 어지러운 짐더미 속에 흩어져 있던 계약서와 서류들을 한 데 묶느라 스테이플러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스테이플러는 꼭 필요할 때 사라지곤 했지요. 이 서랍 저 서랍을 열어보다 똑같은 스테이플러 5개를 찾아낸 순간은 정말 고전적인 조크 같았습니다. 아아, 하나같이 악몽 같은 기억뿐이군요. 몇 번의 악몽을 거쳐 소비의 순간은 가능한 한 언제나 쾌적해야 한다는 원칙이 만들어졌습니다. 쾌적한 소비란, 완전하게 마음에 드는 것을, 꼭 필요한 시점에, 무리하지 않는 마음으로 지불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것이 꼭 필요한 순간에 딱 맞는 금액일 가능성은 극도로 낮습니다. 여러모로 눈이 높다면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집니다. 보통은 돈이 문제지요. 하지만 1천만 원 미만의 소비 규모에서는 눈을 낮추는 것보다는 계획적인 지출이 될 수 있도록 돈을 더 모으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보느냐 하면, 눈높이를 희생한 크기만큼 스트레스가 가중되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는 필연적으로 기능의 낭비 또는 중복 구매로 이어지기 쉽고, 어느 쪽이든 낭비의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돈이 모자라더라도 덜 마음에 드는 것을 사거나 할부로 시간을 앞당기기보다는 모자란 금액을 직접 모으는 시간만큼 숙고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그러다 보면 금액을 초월하는 가치를 더 섬세하게 탐구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그 안에서 확고한 취향의 기준이 생겨납니다. 더 나은 소비, 더 합리적인 소비로 이어질 수 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어주는 것들 말입니다. 사실 에어팟이 나의 손아귀에 들어오기까지는 6개월, 소니 카메라는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지금 둘 다 매일같이 손때를 묻혀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의 손때도 묻지 않도록 케이스를 씌워 소중히 사용 중입니다. 새 아이폰은 의외로 2.5년째 숙고하고 있습니다. 현재 13 미니인 아이폰은 숙고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우연히라도 부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나의 조심스러운 성격 덕분에 아이폰은 여전히 흠집 하나 없이 튼튼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나의 물건이 여러 가지 응용 기능을 갖추면 좋은 경우도 있지만, 무언가를 구매할 때 잠재적인 사용성의 확장을 고려하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본연의 기능에 더 충실한 제품을 구분하여 구매하자는 주의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복 없이 믿을 수 있는 브랜드를 몇 가지 정해둠으로써 쾌적한 소비를 실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양품의 젤 잉크 노트식 볼펜(0.5mm)은 언제나 믿을 수 있습니다. 잉크의 잔량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반투명 바디, 고무 그립 없이도 손가락에 적당한 마찰력을 주는 소재감, 끊김 없이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젤 잉크와 선명한 발색, 0.5mm의 범용성, 1,300원이라는 합리적인 금액.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브랜드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한 스테디셀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잉크가 다 떨어질 때쯤 나는 무인양품을 가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잔뜩 고조됩니다. 아아, 무인양품은 아무 이유 없이도 항상 가고 싶은 곳이므로,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가는 길이 더 신이 나지요. 애플 제품은 오래도록 일관된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일관되게 비싸다는 점이 문제입니다만, 나는 대체로 호의를 가지고 수긍하는 편입니다. 소니의 미러리스와 하이엔드 콤팩트 카메라는 결과물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고집스럽게 50mm 화각을 유지하는 나에게 그들의 집요한 오토포커스 기술은 피사체를 향하는 시선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디키즈(Dickies) 헤비듀티 웨어는 10년의 세월을 거뜬히 견딥니다. 튼튼한 소재와 박음질,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으로 말입니다. 10년 동안 입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나의 허리둘레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제품의 핵심 가치를 정의하고 타협 없이 밀고 나가는 정직한 구력의 브랜드들입니다. 안심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브랜드가 구축한 두터운 신뢰의 성벽 안에서 나는 선택의 피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가격표에 휘둘리거나 조악한 품질에 배신당할까 걱정하는 대신, 물건이 지닌 본연의 기량에 나의 일상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셈이지요. 믿을 수 없는 것은 보통 나라는 사용자 쪽입니다. 일종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달까, 이런 성향은 물건에 대한 경험을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통제하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숙고의 시간은 길고, 때론 지루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내 손아귀에 들어온 물건들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들을 낭비하지 않고 매일 소중히 다뤄줄 것입니다. 아아, 그러니 나의 필드에서 기량을 뽐내지 못한 채 벤치만 지키는 선수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펜은 계속해서 나의 기억을 덜어주고, 카메라는 매일 예쁜 피사체를 쫓아다니며 제 몫을 다하겠지요. 꼭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그것들이 지닌 본연의 기능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 그것이 내가 정의한 쾌적하고 정돈된 생활환경의 풍경입니다. 결국 나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 삶과도 맞닿아 있는 법이니까요. # Outgoing Link [Brunch: 낭비란 없다](https://brunch.co.kr/@yonkim/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