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동네산책(3) 헬스장의 사랑스러운 빌런들
## 들어가며
나는 월, 수, 금요일마다 헬스장에 갑니다. 넓고 쾌적한 곳은 아니지만 등, 하체, 상체 메인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야무지게 갖춰져 있고 창밖을 보면서 뛸 수 있는 트레드밀도 있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레그컬 머신이 있으면 딱 좋을 자리에 전자동식 거꾸리가 있고, 체스트 프레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덜덜이(벨트 마사지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늘 요상한 트로트가 흘러나옵니다. 아무래도 전반적인 이용객의 연령층이 조금 높기 때문인데요.
우선 나는 상당히 기계적인 루틴으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는 상당히 무신경한 편입니다. 그러니까,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전·후면 사슬 근육을 단련하고 트레드밀을 뛰는 데 차질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근육질의 젊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도, 트렌디한 음악이 흘러나올 필요도 없다는 주의입니다. 음악은 어차피 에어팟이나 헤드셋을 쓰니까요. 그러니, 정해진 시간에 열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하는 헬스장입니다.
게다가, 모든 회원에게 친절한 여자 트레이너 선생님도 한 분 계십니다. 그녀는 월요일마다 헬스장에 상주하며 회원들이 다치지 않도록 보조하고, 여러 가지 유용한 운동 지식도 알려줍니다. 아마도 50대 초반 정도가 예상되는 그녀는 운동을 오래 한 사람 특유의 탄탄한 프레임을 지녔고, 짤막한 숏컷이 잘 어울리는 여자입니다. 피부도 엄청 좋고요.
헬스장이 한산할 때 그녀는 종종 정석적인 역도심 자세로 바벨을 들거나, 무릎이 안으로 전혀 말리지 않는 완벽한 각도로 레그프레스를 밀곤 합니다. 나는 무엇이든 정석적인 사람들을 저항없이 멋있다고 느끼는데, 어릴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그녀는 멋있습니다. 나의 은근한 존경을 담은 눈빛, 월요일마다 그녀에게 보내는 중입니다. 그녀에게 올바른 자세를 배운 뒤부터 데드리프트를 할 때마다 겪던 고질적인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한몫하고요. 그 일 이후로 그녀는 내 마음속 NPC에서 승리의 여신 니케(Nike)로 격상되었거든요. 아무튼 그녀는 멋있습니다. 멋있는 그녀가 있는 헬스장은 좋은 헬스장입니다.
---
며칠 전에도 나는 루틴대로 헬스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날로그식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에, 입구의 종이 명단에 직접 이름과 입장 시간을 적어야 합니다. '09:32 욘킴', 이런 식으로요.
이름을 적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거꾸리 머신에 박쥐처럼 매달린 할아버지, 트레드밀을 옆으로 걷고 있는 아저씨, 벤치에 앉아 쑥덕거리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보입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입니니다. 아무하고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곧장 라커룸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원초적인 공간, 이를테면 땀을 흘리는 헬스장이나 옷을 벗어야 하는 사우나에서는 무척 낯을 가리기 때문에 인사를 잘 하지 못하거든요. 마음속으로는 익숙한 얼굴들에 조금은 반가워하고 있지만요.
락커룸에서 운동용 신발로 갈아 신은 뒤 머리를 묶고 헤드셋을 착용합니다. 그리고 12곡 남짓한 workout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합니다. 새롭게 추가하지도, 빼지도 않는 늘 같은 열두 곡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애플워치의 심박수 측정 기능을 켜고 나면 루틴 시작입니다. 우선 이대로 45분 정도의 시간 동안요. 머신을 밀거나 당기고, 바벨이나 덤벨을 들기도 하며 상하체의 큰 근육 위주로 단련하려 애씁니다. 전체적으로 피로한 느낌이 들 때까지, 애플워치가 210kcal쯤 기록할 때까지 말입니다.
근력 운동을 마치고 나면 트레드밀에 올라가 달리기 케이던스용 노래, "100 gecs - Doritos & Fritos" 를 1곡 반복 재생으로 틀어둡니다.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균일한 속도로 약 1.2마일(mile) 정도 달립니다. 2km라고 쓰지 않고 1.2마일이라 쓰는 이유는, 마일로 쓰면 왠지 좀 그럴싸하게 달린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헬스장 트레드밀이 아니라 어디 휴양지 해변을 달린 것처럼요.
그럴싸한 기분으로 15분쯤 달리고 나면 천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합니다. 한껏 두근거리는 심장을 차근차근 진정시켜야 하니까요. 완전히 멈춘 트레드밀에서 내려와 정수기에서 차가운 냉수 한 컵을 뽑아 들이킵니다. 이로써 오늘의 운동 끝. 이것을 월, 수, 금요일마다 반복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헬스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그들도 나를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똑같은 루틴으로 말입니다.
헬스장에선 여러 사람을 마주치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버린 3인이 있습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을 사랑스러운 빌런들, 빌런 1, 2, 3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건, 그들은 분명 빌런이지만 '사랑스럽다'는 점입니다. 지금부터 그들을 소개합니다.
---
## 빌런 1: Oxygen 아저씨
그는 헬스장의 모든 것에서 유산소 운동을 뽑아내는 남자입니다.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덤벨을 가슴 앞에 움켜쥐고 고블렛 스쿼트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등산과 동네 산책의 중간쯤에서 합의한 듯한 가벼운 기능성 상의에 편안한 반바지를 입고,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가벼워 보이는 체격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트레드밀로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습니다. 그는 프리웨이트 데드리프트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데드(Dead)리프트가 아니었습니다. 바닥에서, 그러니까 아무런 위치 에너지도 없는 상태(Dead stop)가 아닌, 바벨을 이미 들고 있는 상태에서 반동을 이용해 내려갔다 올라오는 동작이었습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요. 바벨이라기보단 스프링 같달까, 탄력적이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나까지 튕겨 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야무진 호흡도 잊지 않았습니다. "훗훗, 촷촷!" 그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복압이 자꾸만 풀리는 바람에 고블렛 스쿼트 자세가 자꾸만 무너졌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런지를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런지(Lunge)가 아니었습니다. 런지에는 본디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그와 나의 스포츠적 언어의 간극이 있는 것이라 믿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내가 아는 런지는 한쪽 발을 앞으로(또는 뒤로) 내딛고 무릎을 굽혔다 일어나는 하체 동작을 말합니다. 스쿼트와 함께 하체를 단련하는 최고의 맨몸 운동 중 하나죠.
반면, 펜싱에서의 런지는 팡트(Fente [fɑ̃ːt]), 즉 찌르기를 위한 하체 동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앞발을 앞으로 크게 뻗으며 상대를 찌르는 동작으로, 최다 득점이 가능한 강력한 공격 기술이죠. 뒷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밀어내며 몸을 앞으로 튕겨내므로, 폭발적인 돌진 느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아, 그의 런지는 팡트였습니다. ("훗훗, 촷촷!")
나는 이쯤에서 고블렛 스쿼트를 포기하고, 가능한 한 그가 보이지 않는 방향을 보며 할 수 있는 운동을 생각해 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그는 헬스장의 모든 공간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벤치 프레스 머신 아래 누워 빈 바를 빠르게 밀다가, 일어나 점프하며 머리 위로 손뼉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레그 익스텐션 머신에 앉아 5kg 정도의 무게를 빠르게 들다가 다시 일어나 몇 가지 러닝 드릴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슴 운동과 점핑 잭(Jumping Jacks), 그리고 하체 워밍업이 결합된 일종의 유산소 운동 세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2세트를 마치자마자 정수기로 달려가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세트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나는 레그프레스 다섯 세트를 막 마쳤을 때처럼 온몸의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헬스장을 다닌 이래로 나에게 찾아온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를 보느라 나의 자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 세트에 몇 개를 하는지 세어보느라 나의 동작을 셀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루틴 전체를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날의 하체 루틴과 트레드밀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있는 한, 나는 도무지 집중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대로 라커룸에서 짐을 챙겨 도망치듯 입구로 향했습니다. 도망치는 나의 뒤로 그가 제자리뛰기를 하며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훗훗, 촷촷!")
다음 날,
나는 전날 못다 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다시 한번 헬스장에 갔습니다. 입구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와 마주쳤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먼저 명단에 이름을 적고, 내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명단에서 실로 믿기지 않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09:50 옥시전".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참고로 한국에 있는 옥씨는 모두 의령 옥씨(宜寧 玉氏) 단 하나의 본관이며, 사용하는 한자는 구슬 옥(玉) 자입니다. 즉, 그의 이름은 옥(玉)시전, 영어로는 Oxygen(산소)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어릴 적 모았던 포켓몬 스티커를 모두 걸고 맹세컨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아, 나는 그제서야 그의 모든 동작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고탄성 리프트, 펜싱 팡트(Fente [fɑ̃ːt]), 정체 모를 운동 세트까지 모두요. 그는 나를 괴롭히려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이름에 꼭 맞는 운동,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안심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빌런이었던 그가 나의 마음속에서 일종의 애정을 부여받은 순간이었습니다.
---
## 빌런 2: 웨이트 할머니
그녀는 모든 이용객들의 세트 쉬는 시간에 머신을 가로채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회색 나이키 메쉬캡과 하얀색 나이키 드라이핏 긴소매 위에 청록색 나이키 드라이핏 민소매를 레이어드 하고 무릎까지 오는 카고 팬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무릎과 팔꿈치엔 스트랩형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고, 근력 운동용 장갑도 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무엇이든 정석적인 사람들을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복장은 언더아머로 점철된 근육질의 헬스보이들보다도 더욱 믿음이 갔습니다.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러닝머신을 걷거나 거꾸리에 거꾸로 매달리지 않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웨이트 존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5kg짜리 덤벨을 양손에 쥔 채 정석적인 동작으로 헛둘헛둘, 암 컬을 하면서요. 그녀가 대략 83세 정도 연배의 인상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실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트레이너 선생님을 제외한 헬스장의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았던 깊은 존경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그녀가 알아차릴 만큼 강렬한 눈빛은 아니었겠지만, 확실한 팬심을 담아서요. 그리곤 노이즈 캔슬링을 활성화해 둔 헤드셋으로 workout 플레이리스트의 두 번째 곡(NewJeans - ETA)을 들으며 렛풀다운을 실시하였습니다.
견갑 하강, 다리 고정, 허리 휘지 않기, 팔로 잡아당기지 않기. 등근육을 자극하는 건 까다롭습니다. 렛풀다운은 집중을 많이 해야 하는 운동이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동작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세 세트째에 이르렀을 즈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톡, 톡 두들겼습니다. 나는 당기던 바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나는 (Baby, say the words and I'm down (say the words and I'm down) 부근을 지나는 중이던 음악을 멈추고 헤드셋을 벗었습니다.
"얼마나 더 할 거유?"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어쩌면 그녀가 세트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에 교대로 렛풀다운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가 그런 문화를 아는 세련된 할머니일 수도 있었습니다. 네, 나는 퍽 낙관주의자입니다. 낙관적으로 살면 세상이 덜 못생겨 보이거든요. 나는 덜 못생긴 세상을 상상하며 대답하였습니다.
"두 세트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의 낙관적인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곧바로 역제안을 건넸습니다.
"나는 한 세트만 하고 갈건데... 혹시 내가 먼저 좀 해도 될라우?"
나는 늘 같은 루틴으로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창 사용 중인 기구에서 비켜주는 게 그다지 달갑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아. 그녀는 지긋한 연세의 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렛풀다운 '한 세트'가 포함된 그녀만의 루틴이 있는 거겠죠. 그것을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할머니가 한 세트를 하는 동안 나는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있으면 되니까요.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기구를 양보하였습니다. 그녀가 고마워하며 렛풀다운 의자에 앉는 동안, 나는 조금 비켜 서서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그녀의 '한 세트'가 무엇을 얼마큼 한다는 뜻인지 추호도 물을 생각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녀는 우선 운동용 장갑의 스트랩을 타이트하게 조였습니다. 그리고는 10kg 위치에 무게 핀을 꽂고, 어깨너비보다 넓게 잡는 와이드 그립(Wide Grip)으로 바를 잡고 앉았습니다. 나는 은근한 신뢰의 눈길로 그녀를 곁눈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렛풀다운(Lat Pulldown)은 헬스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등 운동 기구입니다. 이름의 'Lat'은 등에 있는 가장 큰 근육인 광배근(Latissimus dorsi)을 뜻하고, 'Pulldown'은 아래로 당긴다는 의미죠. 즉, 머리 위쪽에 달린 바(Bar)를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등 근육을 발달시키는 동작을 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 하는 턱걸이처럼 되죠.
하지만 나의 상식은 틀렸습니다.
그녀는 앉은 채로 몸을 좌우로 90도씩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와이드 그립으로 잡은 바를 전혀 당기지 않고요. Lat도, Pulldown도 아니었고 무게도 전혀 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어쩌면 본격적인 세트 시작 전에 어깨와 허리를 먼저 풀어주는 차원에서 그런 동작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왼쪽 오른쪽을 수차례 번갈아 본 그녀는 이번엔 머신을 등지고 거꾸로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동작을 이어갔습니다. 바가 그녀의 정수리 위에 줄곧 머물러 있었으므로, 그 동작을 기구를 바라보며 하는 것과 기구를 등지고 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꽤 당황스러웠지만, 그녀가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동작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곧 다시 정자세로 앉았고, 20kg 위치에 무게 핀을 꽂았습니다. 나는 피어오르던 불안이 다시 가라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의 안심은, 아아. 틀렸습니다.
나는 그냥 틀렸습니다. 무엇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우선 허벅지 패드 위에 두 종아리를 올렸습니다. 정석적이지 않은 착석 자세였습니다. 그 상태로 바에 매달린 채 체중을 실어 뒤로 힘껏 누웠습니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공중으로 날렵하게 솟구쳤습니다. 마치 서커스 곡예와 같은 동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렛풀다운 기구 위에서 일종의 아크로바틱 동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최초로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녀가 누울 때마다 거꾸로 뒤집힌 얼굴의 희번뜩한 두 눈이 계속해서 나와 마주쳤습니다. 나는 이제 참을 수 없이 당황스럽고 혼란했습니다. 왜, 도대체 왜냐고, 어째서냐고 묻고 싶어졌습니다.
게다가 한 세트만 한다던 그녀는 최소 10분이 넘도록 기구를 점유하는 중이었습니다. 한 세트의 끝이 어디인 걸까, 렛풀다운 머신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인 걸까, 도대체 도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묻고 싶었습니다.
What's your ETA? What's your ETA? (mm-hmm)
What's your ETA? What's your ETA? (mm-hmm)
What's your ETA? What's your ETA?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녀의 시리즈 동작들, 너무나도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난입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다음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얼마큼이건 간에, 오늘 중으로 내가 이 기구를 다시 되찾을 방법 따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다음엔 무슨 동작을 할지가 궁금하여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일전의 빌런 1, 의령 옥씨(宜寧 玉氏) 옥시전 Oxygen 아저씨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나의 루틴 전체를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인 존재였습니다. 결국 나는 그날의 등 루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혼란스러운 데드리프트와 혼란스러운 덤벨 동작 몇 가지를 깔짝거리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트레드밀을 달렸습니다.
다음 날, 전날 못다 한 등 운동을 채우기 위해 나는 또 한번 헬스장에 갔습니다. 스미스 머신 곁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웨이트 할머니와 마주쳤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나이키 풀세트와 보호대,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 정석적인 착장조차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락커룸에서 가방을 열고 있는데, 머리를 말리던 아주머니들이 무어라 쑥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헬스장 전세 냈어?'
'지난번엔 나 거꾸리 하고 있는데 비키라고 하더라니까.'
'어머, 어머. 매달려 있는데?'
'매달려 있는데!'
'나는 저거 뭐야, 어깨 운동 하는데 빼앗겼잖아.'
'세상에.... 곱게 늙어야지....'
그녀들은 나에게도 한마디 했습니다.
"어제 아가씨도 중간에 새치기당했죠? 비켜주지 마요. 아주 상습범이야."
아마도 웨이트 할머니는 나에게 했던 방식과 동일한 수법으로 모든 사람의 기구를 가로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고개만 끄덕이고는 락커룸에서 나왔습니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렛풀다운 머신 위에 앉았습니다. workout 플레이리스트를 막 재생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톡, 톡 두들겼습니다. 이번에도 그녀였습니다. 락커룸의 대화를 떠올린 나는 오늘은 절대 비켜주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세모 눈을 뜨며 헤드셋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가씨, 어제는 내가 너무 오래 했지. 미안해요. 그게 내 루틴이라.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곤 다시 스미스 머신 곁으로 느릿느릿 걸어갔습니다.
아아, 할머니, 루틴이라니. 미안하고 고맙다니. 나는 그녀의 상냥함과 단어 선택에 조금 치였습니다. 그녀의 '루틴'을 구성하는 동작들과 '세트'의 길이감에 대해서는 여전히 찬성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를 향한 날선 마음이 누그러드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의 평화로운 낙관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괴롭히려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기계적으로 지키는 루틴이 있는 것처럼 그녀도 그런 것이 있는 거겠죠. 아니면 단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든 소통하고 싶은 걸지도요. 방식은 좀 서툴지만.
헬스장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포용하는 웰메이드 에피소드, 가능해 보였습니다. 몸의 수련은 곧 마음의 수련인 법. 나는 다시 한 번 안심했습니다. 다음엔 어르신의 한 세트보다 나의 두 세트가 반드시 먼저 끝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나의 오늘의 세상, 다행히도 어제의 세상보다 더 못생겨지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