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동네산책(2) 빈말을 못하는 과일가게 청년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지요, 동네마다 있는 그 정체불명의 셔터식 가게. 문도, 창문도 없이 셔터만 열면 가게가 되는 가게. 시장의 정육점 옆이나, 호떡가게 옆, 또는 김창숙 부띠끄 옆에 자리 잡은 가게 말입니다. 약 한 달에서 석 달 정도의 간격을 두고 '사장님이 미쳤다'는 핑계와 -90% 할인이란 공격적 프로모션으로 무장한 생활 스포츠웨어숍이 되거나, 때밀이 타월에서부터 벼락 맞은 대추나무 주걱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 되거나, 포도건 아보카도건 모조리 빨간 소쿠리에 담아 파는 과일가게가 되는. 네, '기간제 K-개러지 팝업 스토어' 말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있습니다. 개당 천 원인 기름 호떡집과 버스 정류장 사이에 위치한 이 가게는, 분명 모텔 납품용 어메니티 같은 비누와 칫솔을 팔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과일가게로 둔갑해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려던 나의 눈에 빨간 소쿠리에 담긴 참외가 포착되었습니다. 탐스러운 노란 빛깔에 선명한 하얀 골이 패인 참외,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과일가게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장님이 있습니다. 참외 소쿠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손님에게 넉살 좋은 목소리로 "참외 좀 드려?"라고 묻거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리는 사장님이죠. 그는 후자였습니다. 우선 이 글에서 나는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사실 그의 실제 나이는 잘 모릅니다. 대한민국에서 시행 중인 청년기본법에 따르면, “청년”이란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을 말하므로, 그의 인상에서 가늠해 본 나잇살은 장년에 진입했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과일가게 '청년'이라 일컫는 것은 일종의 호의적인 호칭임을 밝힙니다. 아무튼 이 청년은 양평군립미술관에서 팔당역까지 이어지는 남한강변에서 훈련하다 도중에 이탈한 트라이애슬론(*Triathlon, 철인 3종 경기) 선수처럼 입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입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 종목 중에서 특히나 사이클에 강할 것이란 추측쯤은 할 수 있습니다. 피부는 최소 25호 이상의 미디엄-딥 브라운 태닝 톤에,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러 렌즈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화려한 그래픽의 몸에 딱 붙는 스판덱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양평이나 춘천쯤에서부터 사이클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일지도. 아니 어쩌면, 이 많은 과일들을 모조리 자전거로 실어 나르는 사람일지도요. 파트라슈의 인간 버전처럼요. 아무튼 이 압도적 비주얼의 과일가게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소쿠리 앞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참외 소쿠리에는 택배 상자를 대충 잘라 유성매직으로 휘갈긴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다섯 개엔 오천 원, 열 개는 만 원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노란 참외 위로는 '성주 참외'라고 쓰인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가격표에도 성주 참외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뻔하고 당연한 정보를 텍스트로 여러 번 제공하여 불필요한 소통의 발생을 차단하려는 전략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흡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청년에게 직접 물을 수밖에 없는 정보였습니다. - "참외 달아요?" 그는 나를 쳐다보았지만, 미러 렌즈 뒤편의 눈동자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번에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눈빛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무슨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유추할 수 없었습니다. 20초 정도 길고 긴 뜸을 들인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글쎄요, 달다고 할 수 있을지..." 나의 머릿속에는 곧바로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그의 대답은 성가신 손님을 대할 때의 성의 없는 톤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뭐랄까, 좀 신중하고자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서 10초 정도 흠... 하며 고민을 하던 그는, 다시 운을 뗐습니다. - "맛있는 참외긴 해요." 달다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맛있는 참외라, 어쩐지 설득이 된 나는 참외 5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소쿠리에 담겨 있던 참외 5개를 봉투에 담고, 카드와 영수증을 챙겨주는 동안 내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참외를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하게 닦고, 과도로 껍질을 깎은 뒤, 반으로 갈랐습니다. 희고 단단한 과육 가운데 씨앗이 촘촘하게 박힌 부드러운 젤리 같은 부분에서 참을 수 없는 단내가 물씬, 뿜어져 나왔습니다. 나는 그것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나나 보트 모양으로 8조각을 냈습니다. 손가락이 과즙으로 끈적해지는 동안, 어찌나 조바심이 나던지요. 접시에 담자마자 한 조각을 집어 들곤, 곧바로 베어 물었습니다. 아아. 달았습니다. 참 달았습니다. 참(true)외였습니다. 달고 아삭거리는 여덟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과일가게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말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참외는 달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다고요. 충분히 달콤하면서도, 참외의 맛을 충실히 내고 있다고요. 그러니 앞으로는 달다고 하라고요. 다섯 개 모두 달콤했던 참외는 이틀 만에 동이 났고, 나는 다시금 과일가게로 향했습니다. 기간제 K-개러지 팝업 스토어지만, 되도록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다행히 과일가게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이클 유니폼과 미러 렌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청년도 그대로였습니다. 아아, 안심입니다. 이번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참외 10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검정 비닐봉지에 참외 10개를 담아주고는, 카드를 받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의 눈에 새로운 과일이 들어왔습니다. 딸기였습니다.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는 빨간 딸기는 한 팩에 5,000원이었습니다. 논산 딸기 스티커가 붙어 있고, 소쿠리 앞에도 논산 딸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흡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카드와 영수증을 가지고 돌아온 청년에게 나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딸기 달아요?" 이번에도 그는 단번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카드와 영수증과 참외 10개가 담긴 봉투를 든 채로 서서 길고 긴 뜸을 들였습니다. 이번엔 참외보다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 같았습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글쎄요, 다느냐... 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10초 정도 더 뜸을 들인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 "... 아무래도 1월에 출하된 논산 딸기보다는 덜 달겠죠." 1월에 출하된 논산 딸기보다는 덜 달 수밖에 없는 5월의 딸기. 나는 이 정직한 설명에 곧바로 매료되어 딸기도 한 팩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시 말없이 카드를 가지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참외가 든 봉투와 딸기 한 팩을 나에게 건네주지는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다시 한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이번엔 나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듯했거든요.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참외 봉투에 같이 담아도 될까요?" 아아,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빈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장사를 하다 보면 현란한 말솜씨는 아닐지언정 빈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신념인지 성격 때문일지 솔직하게만 말하는 사람인 거죠. 뜸을 들이는 이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정제하는 데 드는 시간일지도요. 고뇌하는 거죠. 참외가 달다고 말할 수 있을지..., 딸기가 달다고 말할 수 있을지..., 봉투 하나를 더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될지...,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정직한 기인처럼 느껴진달까, 호감을 주는 태도였습니다. 나는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며 "푸폽, 같이 담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참외 봉투에 딸기 한 팩을 담아 카드와 영수증과 함께 건네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딸기와 참외를 흐르는 물에 닦고, 손질하여 접시에 담았습니다. 혹시 몰라 꿀도 조금 떠서 작은 종지에 담았습니다. 참외는 자르기도 전에 단내가 풍겼으므로 의심할 것도 없었지만, 딸기는 아무래도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겨울보다는 향도 옅고 신맛이 강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그렇다면 꿀을 찍어서 먹을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딸기 맛이 기대 이하더라도, '딸기가 왜 이렇게 안 달아요!'라고 가서 따져 묻고 싶은 마음 따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꿀을 찍지 않은 딸기 한 조각을 디저트 포크로 푹, 찍어 입에 넣었습니다. 아아. 달았습니다. 꿀처럼 단맛이었습니다. 꿀기(very very strawberry)였습니다. 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참외 한 개와 딸기 한 팩을 모조리 먹어 치운 나는 부른 배를 두들기며 다시금 과일가게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은 침샘 자극형 인간미를 갖췄군요. 이젠 그를 대신해서 과일을 팔아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참외 사세요, 이 집 참외는 100% 확률로 달다고요. 딸기 사세요, 이 집 딸기는 5월에 출하된 딸기조차도 꿀맛이라고요. 달다고 말해도 돼요. 빈말이 아니라고요. ![img](https://lh3.googleusercontent.com/d/1IWcynNRzoWAJFUmEpMzT7mn77-XDqLO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