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writing
# 왜살지
>`2025-10-06T21:19:57: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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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사에서 보았습니다. 사람 적혈구의 수명이 120일이라고 합니다. 넉 달 전에 내 혈관을 흐르던 적혈구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모두 새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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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소멸한 것들과 그 자리에 새로 채워진 것이 지금의 나라는 단순한 진실. 지금도 나는 조금씩 소멸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나는 얼마나 남은것인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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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1T20:14:15: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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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비슷한 날들을 사는 것은 건조하고 재미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만,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파민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그냥 내가 아는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쪽이 났습니다. 단골 제육볶음집 사장님이 갑자기 정통 나폴리 피자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평소의 제육볶음에 고기를 조금 더 얹어주는 것이 나은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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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1T13:01:56: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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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나는 인생이란 거대한 서사시 같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딘가에는 특별한 사건이 기다리고, 새로운 모험이 시작될 것이라 말입니다. 인생은 그래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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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2T08:01:56: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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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집 앞 편의점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앞에서 갑자기 왜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서성거리다가 그냥 과자를 몇 개 집어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유를 사러 갔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과자가 더 먹고 싶습니다.인생의 절반이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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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6T18:45:10: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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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달력을 아무 데나 펼쳐 짚어본다 해도, 그날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때는 그게 좋은 날인지 몰랐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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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9T07:57:18: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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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워서 빈둥거리는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 아닙니다. 전기장판이 너무나도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장판이 나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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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9T18:13:49: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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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대체 왜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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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냥' 살고 있다는 사실이 별문제 없이 성립하고 있을수록 왜냐는 질문은 새삼스럽기 마련입니다. 만일 "엥 뭘 물어 그냥 사는거지" 이상의 대답이 어렵다면, 시간을 들여 고민해 볼 만한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미라는 문제에 한 번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요.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꿀꺽 삼키던 순간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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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7T21:17:28: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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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스스로에게 유익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자주 생각합니다. 이또한 "왜 살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부산물입니다. 규칙적인 운동과 절제된 식단이 정신의 잉여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날이 갈 수록 탄탄해지고 있는 근력을 존재론적인 고민에 쏟아붓는 중입니다. 나름의 답을 찾고 나면 그것이 앞으로 나의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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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08T22:53:09: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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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조급해서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게을러서 다시 낙원에 입성하지 못한다. (Kafka, 1984a: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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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T21:44:53: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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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는 건 물리적인 믿음입니다. 나는 의식의 영역에서 시간을 해킹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감옥의 창살을 부수고 시간의 중추를 비틀 수 있거든요. 깨어있는 동안에도 꿈속을 헤매고, 과거의 과거, 미래의 미래를 넘나드는 식으로 말이죠. 해킹된 내면세계의 타임라인은 편집점이 없습니다.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하나의 순간으로 회귀시킬 수도 있고, 되감아진 별들의 시간이 심장으로 모여들어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시제가 없는 기억을 로드(load)하고, 그로부터 현재의 숨을 차오르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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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T22:21:32: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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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 not try and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 - `"What truth?"`
> - `"There is no spoon.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that bends, it is only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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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T22:37:13: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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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생애주기는 비선형적입니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수많은 시나리오를 맞닥뜨리죠. 그러므로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적중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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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T22:37:18: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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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이 일으키는 파동에 지금까지의 나와 먼 훗날의 내가 모두 진동한다면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는 것이라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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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원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상상을 보태면, 나는 시간이 선형적이라기보단 방사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떨어지거나 솟아오른 사건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파동의 형태라고 보는 거죠. 겹겹의 원의 형태로 요동치는 시간 위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적으로 출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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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오르내리는 높이의 간극을 단면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성적인 착시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과거의 한 점으로부터 미래의 어떤 점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믿으면서요. 틀을 깰 수 없는 우리는 순간을 잡아두기 위해 몰두합니다. 쓰고, 찍고,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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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T22:37:35: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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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말 벅찬 순간은 사진을 남기지 않습니다. 화소 속에 가두는 순간 본질을 잃고야 말거든요. 기억의 원본은 이미지가 아니니까요. 기억의 원본은 온몸의 세포가 동시다발적으로 감전된 흔적입니다. 세포는 기억을 싣고 떠돌아다닙니다. 어디쯤을 얼마나 떠다닐지는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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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내가 신호를 줄 때, 세포는 감응하고, 분열하고, 증식합니다. 그리고 심박수나 털을 세우는 소름, 허벅지 안쪽이나 어깨와 같이 민감한 부위에서 랜덤하게 되살아납니다(re-spawn). 그러므로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참으로 명징한 표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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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0T02:27:49: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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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은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부의 자극과 기억에 의해 재구성될 뿐. 그래서 떠오르는 것들의 시작과 끝을 추적했을 때 그 기원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이겠죠. 때론 어떤 문장, 어떤 장면, 어떤 음악의 소절, 음식과 자연과 공간, 때론 그것들 모두. 그 발원지가 어디고 무엇인지 정확히 발라내기란 불가능하달까. 좋은 발상은 탄수화물을 얻으려고 밥을, 단백질을 얻으려고 고기를 먹는 식으로 섭취한 결과라기 보다는, 온갖 것을 먹어치우는 와중에 무작위로 합성된 무언가를 마음을 다해 쏟아낸 것에 가깝다는 생각. 제대로 소화되었다면 독특하고 고유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그런 모방의 배설물이 되는거죠. 될 수 있는한 나는 넣은 모양 그대로 출력하는 복제보다는 내 안에서 꺼내졌지만 여전히 생동하는 사고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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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0T02:41:25: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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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은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외부의 자극과 기억에 의해 재구성될 뿐. 그래서 떠오르는 것들의 시작과 끝을 추적했을 때 그 기원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이겠죠. 때론 어떤 문장, 어떤 장면, 어떤 음악의 소절, 음식과 자연과 공간, 때론 그것들 모두. 그 복합적인 발원지를 정확히 발라내기란 불가능하달까. 좋은 발상은 탄수화물을 얻으려고 밥을, 단백질을 얻으려고 고기를 먹는 식으로 섭취한 결과라기보다는, 온갖 것을 먹어치우는 와중에 무작위로 합성된 무언가를 마음을 다해 쏟아낸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제대로 소화되었다면 독특하고 고유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그런 모방의 배설물이 되는거죠. 나는 될 수 있는 한 입력 그대로 출력하는 복제보다는 내 안에서 꺼내졌지만 여전히 생동하는 사고를 원합니다. (일주일간 4편의 영화와 4권의 정신없는 병렬독서와 5시간의 플레이리스트와 15km의 러닝과 7잔의 말차를 마신뒤 합성한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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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0T23:44:07: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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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온갖 무작위한 사건의 집합체고 그것들을 감당하는 매 시점에 여전히 살아있는가로 수렴하는 질문이다. 삶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것이다.
^540e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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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0T23:46:56: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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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은 결코 포섭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계속해서 탐색의 대상이 됩니다. 세계는 발각되는 것이기에 나의 은둔 또한 성립합니다. 관계의 영원을 믿지 않기에 매 순간 온 마음을 쏟을 수 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나로 환원할 수 없기에 매번 새로운 호기심의 동력원이 됩니다. 허상, 과시, 오만, 차별, 편견, 권위로 축조된 모든 찰나적인 착시로부터 기꺼이 탈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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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된 나를 해체하고 매 순간 삶을 둘러싼 파편들을 조율하고 배치하는 아상블라주로서의 세계. 닫힌 방 안에서의 고립이 아닌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가능세계를 탐색하는 주체적 은둔, 대상과 나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두는 관조를 택함으로써 계속해서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 그것이 내가 마주한 [[은둔기계]]입니다.
^cdc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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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5T21:29:40: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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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온의 생산은 기계적입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각자의 궤도에 안착시키고,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되 엉키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거든요.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촘촘한 연결로 직조되는 일상, 단조로운 리듬 안에서 균일하게 찍어내는 매일의 형상, 그로부터 고른 박자의 심박수가 생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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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은 곧 생산의 필드. 모든 것에 숫자를 달아둡니다. 이를테면 1,823,719개 식물의 흙이 마르는 주기(참고1: 욘킴은 식집사), 어항의 물을 20%, 40%, 100% 환수해 주는 날짜(참고2: 욘킴은 베타물고기 집사), 고양이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남은 수명(참고3: 욘킴은 12년 차 고양이 집사), 달리기의 케이던스와 페이스(참고4: 욘킴은 런린이), 쓰거나 읽은 활자의 수와 페이지(참고5: 욘킴은 활자중독), 말차가루를 격불할 물의 비중(참고6: 욘킴은 말차중독)과 번 돈과 벌어야 할 돈과 먹고살 돈과 먹고살지 못할 때를 위한 돈(참고7: 욘킴은 위험 선호 트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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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를 달아둔 모든 것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 그리하여 일상은 하나의 거대한 계측판(Dashboard)이 됩니다. 식물이 시들시들해지면 무언가 잘못된 것. 고양이가 다리를 절거나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갈라진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 달리고 난 뒤 무릎에 통증이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 그로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여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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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문제가 뭘까? 러닝 주법의 문제가 뭘까? 163페이지를 읽은 날과 30페이지를 읽은 날의 간극은 뭘까? -10%의 손실을 상쇄하기 위한 +11.11%의 상승 기회는 어디서 포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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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피드백 루프와 최적화 과정으로 대하면 실존적 불안은 살아남을 도리가 없지요. 생존 테마에 기계적 질서를 투사한 일상, 치열한 동적 평형의 결과물.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는 시대에 역으로 기계의 완벽한 질서를 닮아감으로써 구원을 얻는 인간. 정돈된 질서 안에서 더욱더 격렬해지는 취향에의 사랑(식물, 물고기, 고양이, 러닝, 책, 말차, 숏&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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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ㅏ---Aㅏ---, 21세기형 아타락시아(Ataraxia, 마음의 평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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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01T00:02:45: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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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 부러지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을 똑 부러지게 갖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 - [[성창원 단편집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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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01T00:03:20: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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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맹이 있는 말을 헛소리처럼 하는 사람을 보면 도통 무슨 소린가 싶다가도, 이내 묘한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반면, 헛소리를 알맹이 있는 말처럼 하는 사람을 보면 순간 그럴듯해 보이지만 끝내 알 수 없는 실망감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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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석하게도 대 AI 시대에는 누구나 헛소리를 헛소리 같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압도하는 세태, 하지만 이를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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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아, 나는 계속해서 안심하고 헛소리를 지향하고자 하여도 괜찮겠다.’는 나 스스로를 향한 헛소리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의 모든 헛소리에는 알맹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담았기 때문에 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이쯤에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으시다면 우리의 인간적 연결은 성공입니다. 당신,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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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03T23:57:49: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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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과 필연 안에서 잉태된 감정들을 품고 떠오른 날들, 저물어버린 날들. 그 반복이 남긴 자국들과 그로부터 점차 깊어지는 명암. 계속해서 무언가로 덧칠되어 가지만 결코 무엇으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는 삶, 이라는 그림. [[전시(Exhibition)#^c566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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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20T21:36:49: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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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토록 현상보다는 감정에, 감정보다는 관념에 더 이끌려 살아왔다. 산다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며 살아왔달까. 계속되는 '왜 살지?' 라는 질문엔 당혹스러울 정도로 답이 없지만, 여전히 삶과 세상을 향한 호의를 잃지 않고 되려 좋아하게 되어가고 있으니, 이만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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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20T22:27:05:0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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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의외로 죽음이 늘 곁에 있다고 의식하며 살아가는 타입인데, 아무래도 죽음은 나 자신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감당할 것이 더 많은 이벤트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신변이 모두 정리된 상태에서 1초만에 죽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