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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측과 논박 1,2

## yonkim's review (KR)
칼 포퍼는 20세기 자유주의[^1]를 지탱한 거대한 철학적 기둥 중 한 명이다. 그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자유주의는 단순히 정치적인 구호를 넘어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하고 비판적인 합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의 인식론적 태도가 곧 그의 과학적/정치적/윤리적 사상의 렌즈가 된다고 보았다. 즉,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유기적인 결합인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절대적인 진리 및 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장 경계했다.
『추측과 논박 1,2(Conjectures and Refutations)』은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의 기반이 된 반증주의를 설명하는 방대한 인식론적, 철학적 맥락을 담고 있다.
9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논지의 핵심을 소화해 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지식은 명백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자각하고 오류를 교정하는 과정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인식론을 빌린다.
- [[도그마(Dogma)]], 즉 독단적 태도를 버리고 반론과 논박을 수용하고, 스스로의 주장을 가혹한 시험대에 올리는 비판적 태도가 올바른 과학적 지식 추구 방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과학에만 국한되는 태도가 아니다.
- 과학 이론은 단순히 데이터를 집적해 둔 결과물이 아닌,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추측)을 동원해 자연에 능동적으로 질문을 던진 사상적 모험의 과정이라 말한다. 또한 문화/예술과 같이 인간이 그 산물들의 주체적 창조주라는 관점을 확보한다. 여기서 칸트의 능동적 인식론을 빌린다.
- 이론을 단순히 현상 예측을 위한 도구로 격하시키는 도구주의의 한계, 궁극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맹신하는 본질주의의 오만을 동시에 비판한다.
- 과거의 전통적인 틀린 이론과 오류조차도 비판적 논의의 재료가 될 수 있으며, 지적 진보에 기여한다고 본다.
포퍼는 맹목적인 수용과 맹목적인 배척이 아닌 균형잡힌 비판적 수용의 태도에 대해 강조한다. 또한 그러한 태도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사상적 뿌리에 대해 폭넓게 다룬다.
## Summary
### 서론: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해서
이 책은 지식과 그 성장에 관한 이론이다. 지식은 실수를 교정하는 것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실수'란 인간이 지닌 오류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회의주의적 관점은 아니다. 지식과 그 성장에는 이성과 경험이란 두 가지 도구가 사용된다. 잘못된 시도를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이성'과 실수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는 '경험'이다.
저자는 추측과 논박을 통해 지식이 진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추측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개념이며 논박은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비판을 아주 잘 이겨낸 이론이자 진리에 더욱 근접한 이론이며 이를 실험한 보고서가 동반되면 그 이론은 당대의 과학이 된다. 엄격한 실험을 통해 반증된 이론은 그 즉시 폐기되므로, 이론은 언제나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상태로써 그 과학적 지위가 인정된다.
서론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해서」 는 지식과 무지의 상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한다. 포퍼에 따르면, 데카르트와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근대 철학자들은 '진리는 명백하다(Truth is manifest)'는 낙관적 인식론을 지녔다. 포퍼는 그들의 뿌리가 파르메니데스, 데카르트, 플라톤에 있음을 언급하며 지식의 근원이 신이라 전제한 인식론임을 강조한다.
낙관적 인식론에서, 우리 인간은 본디 신의 은총으로 인해 순수하고 명백한 진리를 이미 알고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잊어버린 본질을 상기하거나 기억해내는 것을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모두 재인지(re-cognition)이자 참된 세계(idea)를 볼 수 있도록 (감았던) 눈을 뜨는 것이다. 즉, 지식의 근원은 신이다.
반면, 무지의 근원은 세상이나 세력에 의해 주입된 거짓된 신념, 편견과 같이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다. 즉, 무지란 이러한 것들로 인해 눈이 가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베이컨의 귀납법,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같은 논리적 기술들은 모두 무지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거짓된 신념을 제거하여 명백한 진리를 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포퍼는 [[메논(Μένων, Menon)]]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노예 소년에게 기하학 문제를 풀게 하는 장면을 비유로 든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와 플라톤의 『메논』은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깊고 흥미로운 접점을 지닌다. 포퍼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오류를 통한 진보'의 방법적 측면인 '논박'은 실상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문답법의 현대적 계승이라 봐도 무방하다. 포퍼의 논박은 어떤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함으로써 진리에 한 발짝 다가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메논(Μένων, Menon)]]의 핵심 기법인 [[엘렌코스(Elenchus)]]와 궤를 같이한다.
지식의 근원을 신 또는 그에 준하는 절대적 권위에 둠으로써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그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에 있다.
포퍼는 이 부분에서 무지에 관한 음모론(The Conspiracy Theory of Ignorance)을 언급한다. 낙관론자들이 "진리는 명백한데 왜 사람들은 모를까?"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악한 세력이 진리를 가리고 우리를 속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음모론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은 세력을 만들고, 세력은 권위주의적 집단으로 거듭난다. 권위를 통해 자신들만이 명백한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반대 의견을 지닌 이들은 지적 토론의 대상이 아닌 포섭하거나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된다.
진리가 명백하다고 믿는 순간, 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즉, 진리는 일종의 무기가 된다. 또한 "내 말이 명백한 진리인데 왜 반대해? 너 혹시 저쪽 세력이야?" 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즉, 비판적 사고가 소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정치적 권위를 지닌 인물과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독재로 이어지기 쉽다. 낙관주의가 독단주의로 거듭나는 단편적인 시나리오이다.
낙관주의가 후대의 많은 좋은 사상들을 고무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타인에 대한 불관용, 종교적 광신, 독재와 같은 나쁜 사상들도 낳았다. 포퍼는 낙관주의의 좋은 의도가 최악의 결과를 낳은 역설적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론의 후반부에서 그는 "지식이 어디서 왔는가(근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지식이 틀렸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검증)"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 이성, 관찰 등 종류를 막론하고 그 어떤 근원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 경험주의의 타당성 문제에 관하여
- 질문1)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 질문2) 당신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포퍼는 경험주의자들이 이전의 관찰자(목격자)를 거듭 추적하는 방식으로 지식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련의 방식이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관찰에서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을 추적하는 일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치된 증언을 무한히 소급해야 하는 것과 사건이 어떤 유혹적인 해석을 시사할 경우 관찰자(목격자)가 상당한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기 두 가지 질문은 권위주의적인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주장에 관해 의문이 생길 경우에 정상적인 절차는 그 근원을 찾기보다는 그 주장을 검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정치 제도가 합리적인 이론으로 나아가려면 `<누가 통치할 것인가? 자본가인가, 노동가인가?>` 라는 양자택일 질문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사악하거나 무능한 통치자가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정치 제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라는 전혀 다른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지식의 최선의 근거(근원)는 무엇인가?>` 가 아닌,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How can we hope to detect and eliminate error?>` 가 올바른 질문이라고 보았다. 즉, 그는 완전무결한 순수한 지식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파네스가 그의 시에서 "모든 것은 한낱 짐작의 얽힘이기에" 라고 말했다는 점을 인용했다. 지식은 어림짐작, 참된 앎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변은 `<다른 사람들의 또는 우리 자신의 이론이나 추측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라 말했으며,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을 요약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서론을 10개의 논제 형식으로 요약하였으며, 이를 다음과 같이 하나의 문단으로 간추릴 수 있다.
> 지식은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추측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며 진보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무한한 무지를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즉, 이러한 무지를 자각해나가는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이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서론을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해서' 전체를 짧게 요약하면, 어떠한 권위도 명령에 의해 진리를 확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결국 인간의 권위를 넘어선다.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이라는 이념을 포기하고, 지식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몽상, 오류, 편견, 소망)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포퍼는 진리에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비판은 권위를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우리는 탐구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고, 추측을 통해 미지의 것을 탐색하고, 비판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를 통해 지식의 추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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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추측(Conjectures)
#### (1) 과학: 추측과 논박
칼 포퍼는 관찰과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과 경험을 증거를 기반으로 하는 비과학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과학적 이론의 범주에 물리 이론, 뉴턴의 이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포함하였고, 비과학적 이론의 범주에는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을 넣었다. 그리고 이 두 범주가 나뉘는 이유에 대해 고찰한다.
비과학적 이론의 공통점은 매 경험을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며 동시에 추가적인 입증 사례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사례가 이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뿐이다. 사례는 관찰의 결과일 수는 있으나 여전히 경험적인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 또한 비과학적 이론은 또한 통상적으로 결과를 모호하게 예측함으로써 예측의 실패 확률을 가능한 0에 수렴시킨다. 항상 적합하며 항상 입증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어떤 사건에도 비판적으로 논박될 수 없다.
반면 과학적 이론의 공통점은 예측된 결과가 관찰의 결과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로 논박이 가능하다. 논박은 반증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관찰과 실험을 기반으로 한다. 즉, 시험 가능성은 곧 반증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반증의 가능성이 이론의 과학적 지위를 성립한다.
과학적 이론은 또한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대담한 시도, 즉 '추측'과 반증을 통한 '논박'으로 완성되어가는 결론이다. 만일 반증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이를 잠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이론이라 규정한다. 이 과정의 합리적인 절차가 추측과 논박인 것이다.
그는 비과학적 이론이 지닌 태도를 독단적 태도, 과학적 이론은 비판적 태도로 보았다. 독단적 태도란, 개인적으로 고정된 유형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며 모든 새로운 경험은 기존의 유형을 검증하여 그것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경향이다.
고정된 유형은 믿음에서 기원한다. 돌이 움푹 파일만큼 반복하여 떨어지는 낙숫물,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비슷한 사건들의 연속이 서서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을 관찰할 때, 우리는 마치 상황들이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규칙성을 부과하려는 욕구와 반복에서 얻는 분명한 기쁨이 동반되어 믿음이 형성되므로, 믿음의 강도는 항상 경험과 더불어 커진다. 즉, 경험의 반복이 믿음의 기원이 되며, 고정된 유형을 만들고 독단적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 비과학적 이론이 과학적으로 반증되더라도 여전히 지지하는 신봉자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바로 이 때문이다. 포퍼는 독단적 태도가 유아기적 태도, 원시적 태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반면 비판적 태도는 의심을 인정하고, 시험을 요구하며, 스스로의 주장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적으로 믿음의 강도가 약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포퍼는 경험이 성숙할 수록 비판적 태도가 강해진다고 보았다.
#### (2) 철학적 문제들의 본성과 그 과학적 뿌리
^7af75e
챕터 전체를 우선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tip] Summary
> - 포퍼는 보이지 않는 수학적/이론적 구조로 현상을 설명하려 한 플라톤의 시도를 현대 이론 과학의 방법론적 시초이자 핵심 도구로 보았다.
>
> - 단순 관찰에 의존하는 대신 인간 지성이 본능적으로 보유한 '추측'을 자연세계에 대담하게 부여하고, 반증을 통해 이를 검증해나가는 능동적 사유로의 대전환이라 규정한다.
>
> - 지식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논박과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며 더 나은 설명력을 갖춰가는 역동적인 사상의 모험인 것이다.
>[!quote]
>어째서 플라톤의 업적이 철학적인 업적이며 어째서 그의 자연철학과 물리학의 일부 이론이 적어도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지를 이 단계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플라톤과 그 이전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세계와 세계에 대한 지식을 향한 새로운 접근법의 의식적인 구성과 설명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접근법에 의해 최초에는 신학적 사상인, 가정된 보이지 않는 세계로써 보이는 세계를 설명하는 사상이 이론 과학의 근본적인 도구로 전환된다. | p179
포퍼의 이 문장은 플라톤이 서구 지성사에 남긴 유산이 단순히 도덕이나 정치에 그치지 않고, 현대 과학의 방법론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짚어낸다. 이를테면, 과거의 사람들은 눈앞의 자연 현상(보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신학적 요소를 소환했다. 예를 들면, "번개가 치는 것은 제우스가 진노했기 때문" 이란 식과 같다.
플라톤은 이 구조를 계승하되, 그 내용을 신에서 추상적인 보편적 법칙, 즉 이데아로 변경했다. 플라톤의 이른바 혁명이란, '현상이 변하는 것은 너무 작거나 멀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배후에 완벽한 기하학적/수학적 구조가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를 기초로하여 물체의 본성을 조사하는 원리를 공식화화 점에 있다. 이 보이지 않는 배후를 설정하고 탐구하는 행위가 곧 현대 과학이 이론(Theory)을 세우고 모델을 만드는 방식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보이는 세계)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중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정한다. 포퍼는 플라톤의 사유 방식이 "현상은 이론적 가설, 즉 추측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이론 과학의 근본 도구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특히, 포퍼가 주목한 것은 관찰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에서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가설을 세우는 플라톤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귀납법에 가깝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 분류하는 방식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 "사과도 떨어지고, 돌맹이도 떨어진다. 사물들은 자신의 원래 위치인 땅으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있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설명)
- 플라톤적 사고: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완벽한 수학적 질서(중력의 법칙)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는 감각적 경험을 신뢰한다. 반면, 플라톤적 사고는 감각을 불신하고 이성적 가설을 검증하려는 시도이다. 포퍼는 관찰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같이 현상 너머의 이론적 모델을 먼저 추측하는 것을 이론 과학의 시작으로 보았다. 일단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있다고 가정한 뒤(추측), 그것이 틀렸는지 현실에서 확인해보는(논박)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 변화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사유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이 된다.
> [!quote] 철학적 문제들의 본성과 그 과학적 뿌리
> 보이지 않는 물체의 구조에 관한 이런 생각은 물리학적인 것인가, 아니면 철학적인 것인가? 만일에 물리학자가 그저 이 이론을 좇아 행위하고 아마도 무의식중에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렇게 행위함으로써 물질의 구조에 관한 특수한 새 이론을 산출한다면, 그를 철학자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이론을 반성하고, 그리고 현상론적이거나 실증주의적인 물리학을 선호하여 이 이론을 거부한다면, 그를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 p180
플라톤은 관념론자로 불리지만, "현실은 불완전하며 그 배후에 완벽한 질서가 있다"는 그의 믿음이 역설적으로는 현대 과학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식과 데이터 속에서 우주의 진리를 찾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포퍼는 `"지식은 존재하고 있었다. 뉴턴은 어떻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라는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질문에 대해서도 잠시 다룬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또는 알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듯이, 뉴턴의 이론은 하나의 경탄할 만한 추측이요, 놀라울 만큼 훌륭한 근사치였다. 그것은 정말 특별하지만 신성한 진리로서가 아니라 한 천재의 특별한 발명으로 볼 수 있으며, 참된 지식이 아니라 억측의 영역에 속한다."
>[!quote]
>우리의 지성은 자연 속에 있는 보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법칙을 규정하여 자연에 그것을 부과한다. | p190
>
>우리는 신화와 이야기와 이론을 만들 수 있고, 설명을 갈망하고,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을 갖고 있고,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중략) 많은 오류를 통해 운이 좋을 경우 <현상을 구제하는> 이야기나 설명을 문득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자나 만류 인력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신화를 구성함으로써,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식은 사상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다.| p191
즉, 우리가 역사속에서 자주적으로 창안한 생각이나 이론들은 엄격한 반증을 통해 단 몇 가지만이 적자 생존 속에서 잠시 살아남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 (3)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본질주의, 도구주의, 추측/진리/실재)
> [!quote]
> 1972년, 원자 물리학 분야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이른바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 를 원자 물리학에 도입했다. 이 원리는 원자 이론을 어떤 것의 기술로서 해석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보어가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양자 역학을 해설하기 위하여 도입한 철학적 개념이다. | p202
포퍼는 이론을 도구주의적(Instrumentalism)[^2] 으로 다루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다. 도구주의자들이 이론이란 결과만 잘 맞히면 그만인 계산기로 취급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인 셈.
물론 망치(이론)가 못을 잘 박는다고 해서 망치에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며, 망치를 단순히 유용한 도구로 취급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디자인이나 건축이라는 개념 안에서 망치를 살펴보면 그 역할엔 보다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포퍼는 이론이 현상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를 넘어 심층적인 실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었다. 뉴턴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단순히 행성의 위치를 맞히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주의 숨겨진 질서를 드러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즉, 포퍼는 이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실재로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에 대한 기술이며, 우리의 정신이 세계를 지적으로 정복해온 증거라고 보았다.
우리는 이론을 통해 세계의 규칙성을 추론하고자 하는 시도, 즉 알려지지 않은 것에 의해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그 이론들을 엄격한 시험에 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이 인류 지식의 영역을 사실상 무한히 넓혀왔다는 점에서 이론은 단순한 도구 이상의 것인 셈이다. 아울러 포퍼는 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감춰져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감춰진 많은 것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본질주의'에는== 기꺼이 동의한다고 말했다.
본질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1) 본질적 실재의 세계, (2) 관찰 가능한 현상들의 세계, (3) 기술적 언어 또는 기호적 표현 세계를 구분해야만 한다. (1)은 (2)의 배후에 있고, 상응하는 실재들이다. (3)은 이러한 실재들의 기술이거나 기호적 표현들이다. 즉, (1)은 본질적 속성, (3)은 이를 기술하는 이론이다. 즉, 우리는 (3)의 세계 안에서 이론을 연역해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3)에 의해 (2) 세계의 속성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주의는 이 도식으로부터 단지 (1)만 제거한 것이다. 그때에 (3)은 (2)를 직접 기술한다. 그리고 (3) 자체는 아무것도 기술하지 않는다.
도구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천문학적 지식이란 단지 (2)의 세계의 별들이 어떻게 운행하는가를 (3)의 세계에 기술한 것에 불가하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관찰들을 기술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예측하는 힘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 [!quote]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1)
> 도구주의에 따른 나의 응답은 <순수> 이론과 기술적 technological 계산 규칙 사이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으며 도구주의에는 이러한 계산 규칙들이 완벽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것들과 이론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해서 도구주의는 무너진다. | p224
> [!quote]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2)
> 순수 과학자에게 요구되는 고도의 비판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도구주의의 태도는 적용의 성공에 대한 자기 만족의 태도이다. | p229
그는 본질에 대한 믿음이,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새롭고 유익한 문제를 제기하며 사고하는데 장애가 되기 쉽다고 말한다. 그 예로, 뉴턴의 고민을 들 수 있다. 뉴턴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는데, 데카르트는 물체의 ‘진짜 본질’이란 다른 물체가 있든 없든 그 물체가 홀로 가지고 있는 성질이어야 한다고 봤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으로 인해 뉴턴은 중력 계산법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 자신은 중력을 궁극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본질주의자였다. 즉, 수학적으로는 중력을 계산해냈지만 "그래서 이 중력이라는 힘이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멀리 떨어진 두 물체 사이를 오가는가?" 라는 질문에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훗날 뉴턴을 괴롭히던 본질주의적 고민은 200년이 지나서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중력은 밀거나 당기는 힘이 아니라, 질량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지는 현상)을 통해 마침내 해결된다.
> [!quote] 추측/진리/실재
> 이론들 중의 일부는 실재와 충돌할 수 있다. 그것들이 충돌할 때에, 우리는 거기 어떤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즉, 우리의 착상들이 잘못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 바로 이 점이 왜 실재론자가 옳은가 하는 이유이다.
> (중략)
> 나는 과학이 실재적인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도구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나는 우리의 발견들이 추측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리상의 탐험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했던 것에 대해 실제로 잘못된 추측을 했다. 피어리는 오직 그가 극점에 도달했다고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의 요소들이 그 발견들을 덜 실재적이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 p235-236
#### (4) 전통에 관한 합리적 이론을 향하여
> [!quote]
> 전통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오직 두 가지 뿐이다. 그 하나는 종종 전통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른 하나는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전통의 금기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거나 그 금기들을 배제하거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전통의 금기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수용 여부를 자신에게 물을 때, 우리는 금기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을 분명하게 관찰하여, 그것이 지닌 기능과 중요성이 무엇인가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마음속으로 모든 것에 물음표를 찍을 태세를 갖추고, 어떠한 전통에도 맹종하지 않는 것이다. | p245
- 오직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the unintended consequences, 발생할지도 모르는 원치 않는 결과들 the unwanted consequences에 대해 알고자 할때만, 사회과학 특유의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직접적인 결과뿐 아니라, 원치 않는 간접적 결과에 대해서도 예견하기를 원한다. 왜? 그것들에 대비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가능한 한 그것들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고 싶기 때문에.
- 사회 음모론자들은 모든 사회적인 현상은 그 현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물음으로써 실제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진정한 과제는 전쟁, 불황 같이 아무도 원치 않는 것들을 설명하는 일이다.
> [!quote]
> 우리에게는 전통이 필요하다. 이 세계는 대단히, 무한히 복잡하다. 전통은 단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으며, 그들이 도달한 곳이 어딘가를 말해 줄 뿐이다. 그 전통은 사람들이 이 세계에 이미 일종의 이론적인 틀을 마련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이 복잡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일종의 네트워크, 즉 좌표 체계의 구실을 한다 | p259
#### (5)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라 (p271-)
이 장을 시작하며, 포퍼는 묻는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합리성>이 그렇게 많이 논의된 까닭은 어떤 점에서일까?" 포퍼 자신의 핵심 철학인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와 반증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를 전개한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을 주로 인용하며 합리성(Rationality)의 진정한 기원과 의미를 재정의한다.
이 장은 다음의 발췌문과 두 개의 문단으로 정리될 수 있다.
> [!quote]
>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알려 하지 않고, 더 이상 경탄하지도 않게 될 때 그들은 모든 매력을 상실한다. 전문화는 과학자에게는 큰 유혹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그것은 치명적인 죄가 된다.
> [!quote]
> 그리스 철학의 초기 역사, 특히 탈레스에서 플라톤에 이르는 기간은 찬란한 역사였다. 너무 훌륭해서 사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각 세대마다 적어도 한 가지 새로운 철학, 놀라운 독창력과 깊이를 가진 새로운 우주론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비밀은 전통, 즉 비판적인 논의의 전통이었다는 것을 나는 제안한다.
>
> 새로운 사상들은 비판적인 논쟁이나 합리적 논의를 통해 제시되며, 개방된 비판의 결과로 등장한다. 은밀한 변화란 극히 적다. 익명의 역사 대신에, 우리는 사상과 그 창시자들의 역사를 발견한다. | p297-299
**비판적 전통의 기원 증명:**
포퍼는 과학과 합리적 사고가 관찰 데이터를 쌓아 올리는 것(귀납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스승의 이론을 대담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가설을 던지는 비판적 전통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 위대한 전통을 창시한 이들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적 합리주의의 배경 제시:**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겸손과 대화를 통한 진리 탐구(윤리적 합리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전 철학자들이 이미 인간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추측을 통한 탐구의 길을 닦아놓았기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피어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포퍼는 또한 다음의 세 가지 단편(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인용한다. 인간 지식의 추측적인 성격을 표현하고, 대담성, 즉 우리가 모르는 것을 대담하게 예측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내는 단편들이라 판단한 것 같다. 그는 하기의 인용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합리주의, 즉 비판적인 논의를 통한 진리 탐구가 인생의 길이라는 그의 신념(그가 알고 있는 최선의 것)을 예시하고 준비한 배경이라 설명한다.
> [!quote] 크세노파네스의 저작(세 개의 단편 인용 DK, B 18, 35, 34) | p304
> 신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만물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리라.
>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탐구를 통해
> 사물들을 더 잘 배우고 알 수 있을 것이네.
>
>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진리와 같은 것으로 추측하네.
>
>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알지도 못할 것이네.
> 내가 말하는 신들이나 만물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 그리고 우연히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모르리라.
> 모든 것은 추측으로 짠 한낱 거미줄에 불과하므로
> [!quote]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DK, B 78과 80) | p305
> 참된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비록 신의 본성에는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이나 특성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돌발적인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발견될 수 없으며,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quote] 데모크리토스의 구절(DK, B 117) | p305-306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포퍼가 이 단편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설득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 지식의 본질과 과학이 나아가야 할 태도에 대한 세 가지 통찰이다.
**(1) 인간 지식은 절대적 진리가 아닌 '추측(Conjecture)'이다**
포퍼는 인간이 신처럼 만물의 궁극적이고 확실한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가 가진 과학적 지식이나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 던진 대담한 추측(가설)에 불과하며, 독자들에게 절대적이고 확고부동한 진리라는 [[도그마(Dogma)]]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2)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은 '대담성'과 '탐구'다.**
비록 확실한 진리는 숨어 있고(데모크리토스), 인간의 본성에는 참된 지식이 존재하지 않지만(헤라클레이토스), 인간은 체념하지 않는다. 크세노파네스의 말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탐구를 통해 사물들을 더 잘 배우고 알 수" 있다. 포퍼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추측), 돌발적인 것을 기대하며 탐구해 나가는 것만이 진리에 근접해 가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3) 참된 합리성은 인식론적 겸손에서 출발한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성은 내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크세노파네스: 우연히 진리를 말해도 자신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데모크리토스: 참된 지식은 신의 것이며, 진리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
이들의 통찰은 곧 "인간은 틀릴 수 있다"는 깊은 겸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고 논박(Refutation)을 통해 오류를 제거해 나갈 수 있다. 반대로 타인에게도 그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 태도가 소크라테스를 거쳐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지적 진보를 이끌어낸 합리성의 진짜 얼굴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
> [!quote]
> 무엇이 아낙시만드로스로 하여금 지구가 북이 아니라 공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이론에 이르지 못하도록 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체로 지구의 표면이 평평하다고 그에게 가르쳤던 것은 바로 관찰에 의한 경험이었다. 그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은 관찰에 의한 경험이었다.
>
> 철학은 사색적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이 아는 것처럼, 과학은 사색적인 방법이 관찰적인 방법으로 대체될 때에, 그리고 연역법이 귀납법으로 대체될 때에만 비로소 시작된다.
>
> 참된 이론만큼 거짓된 이론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거짓된 이론들은 여러 면으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잘못된 이론들은 다소는 근본적인 수정을 암시할 수도 있으며, 또 비판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는 탈레스의 이론은 아낙시메세스에 와서는 수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났으며,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이라는 형태로 재등장했다. | p278 - 284
아낙시만드로스의 예처럼, 관찰에 의존한 경험은 철학적 사색과 심지어 틀린 이론조차 비판과 수정을 자극함으로써 지적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처럼 대담한 추측을 던지는 철학적 탐구는 '사물이 동일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헤라클레이토스가 고정불변의 사물이란 없으며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불)이자 [[로고스(Logos)|이를 통제하는 법칙(로고스)]]에 불과하다는 심오한 통찰에 이르는 밑거름이 되었다.
> [!quote]
> 즉, 합리주의 전통(비판적인 논의의 전통)은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는 실행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관찰이나 실험에서 출발하는 방법은 없다. 관찰과 실험은 과학의 발전에서는 비판적인 논증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중요한 역할이지만,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은 전적으로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 이론들은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더 잘 시험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이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반론에 비추어서, 특히 이론 비판을 목적으로 고안된 관찰적이거나 실험적인 시험에 비추어서 보다 더 완전하고 보다 더 비판적으로 논의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 세계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에는 합리성이라는 단 하나의 요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이론들 자체는 추측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다만 추측할 따름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식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오니아에서 발생해서 근/현대 과학에서 구체화된 실행에 대한 참된 기술이며 앎이란 추측과 논박 conjectures and refutations의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이론이다. 내가 참된 인식론이라고 간주한 것을 명확하게 이해한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두 사람은 갈릴레오와 아인슈타인이다. | p302-303
> [!quote]
> 우리는 진리를 알고 발견하려는 시도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개선을 위해 열려 있다는 것과 우리의 지식이나 학설이 추측이라는 것, 그것이 결정적이고 확실한 진리보다는 오히려 추측이나 가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비판과 비판적인 논의가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그러한 전통을 통해서 거의 필연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담한 추측과 자유로운 비판의 전통(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태도) 및 과학에 근거를 둔 유일한 문명인 서구 문명을 창조한 전통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포퍼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을 빌려, 지식을 대하는 완벽주의나 교조주의를 버리고 "우리의 지식은 한낱 추측에 불과하지만, 대담한 추측과 치열한 비판(논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진리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견지하는 것이다.
#### (6) 마흐와 아인슈타인의 선구자 버클리에 관한 소고[^3] (p333-)
나는 당장이라도 마흐 Ernst Mach[^4]와 헤르츠[^5], 러셀[^6], 프랑크[^7], 미제스[^8], 슐리크 Moritz Shlick[^9],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10] 등 대부분의 실증주의적인 견해와는 생각을 달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버클리[^11]를 높이 평가한다. 과학 철학에 관한 버클리 사상의 핵심은 뉴턴 역학에 대한 비판이다. 버클리는 뉴턴을 극구 찬양하는 가운데서도, 그를 가장 가치 있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 p333-335
상기 문단에서 밝히듯, 포퍼 자신은 마흐나 슐리크 같은 실증주의자들과 철학적 견해를 달리하지만, 버클리만큼은 높게 평가한다. 당대 모든 지식인이 뉴턴의 이론을 절대적인 진리, 즉 본질로 맹신할 때 버클리는 뉴턴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도 성역 없이 그의 이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가 본질주의에 반대한 이유는 그의 도구주의적 경향에서 비롯된 점도 있는 것 같다.)
포퍼는 버클리를 뉴턴 역학의 본질적 한계를 가장 먼저 꿰뚫어 본 예리한 비판가이자, 실증주의 과학철학 및 도구주의의 선구자로 보았다.
> [!quote]
> 물리학적인 분석의 일반적이며 실제적인 결과는 우리가 자연 과학으로부터 모든 본질주의적인 설명들은 선험적으로 배제하도록 해준다. 만일 그것들이 수학적이고 예측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것들은 수학 가설 자체로서 인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모두 배제될 수 있다. 이 면도날은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오컴의 그것]]보다 더 예리하다. 지각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실재가 배제된다. 나는 이를 버클리의 면도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포퍼는 버클리를 관찰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본질 탐구를 배제하고 과학적 개념을 일종의 수학적 가설로 취급함으로써, 훗날 마흐와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지는 물리학적 혁신의 길을 열어준 인물로 그린다.
포퍼는 [[blog/Read/추측과 논박 1,2(Conjectures and Refutations)|추측과 논박 1,2(Conjectures and Refutations)]] 의 모든 챕터에서 과학이 사물의 숨겨진 궁극적 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비판하고 있다. 버클리 역시 뉴턴의 물리학이 우주의 참된 본질(절대 공간, 절대 시간, 물질적 실체 등)을 밝혀냈다는 당대의 맹신을 거부했다. 즉, 당대 최고 권위를 지녔던 뉴턴 역학을 맹신하지 않고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실용적 도구로 정확히 위치시킨 버클리의 비판 정신을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표현을 빌려 높이 평가한 것이다.
포퍼가 오컴의 면도날을 버클리의 면도날로 치환하며 그것이 "더 예리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잘라내는 범위와 극단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이 이론을 단순화한다면, 버클리는 과학 이론에 묻어 있는 관찰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실재(본질) 자체를 뿌리째 도려냈기 때문이다.
```markdown
<어떤 말을 하면서 그 말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버클리, 「운동에 관하여」, 29>
<과학자의 작업은 설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귀결된다. 도달할 수 있는 설명이란 설명된 사물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실제적인 중요성은 있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어떤 것을 적용하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버클리, 「인간 지식의 원리론」, 62>
<현상에 대한 숙고로부터 일반적인 자연법칙에 도달하는 것과, 가설을 구성하여 그것에서부터 현상을 연역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주전원을 가정하고, 그것에 의해 행성의 운동과 현상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사실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참된 원리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버클리, 「시리스」, 228>
```
버클리가 물리적 실체를 부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성공회 주교라는 배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대에 떠오르던 유물론(Materialism)이 무신론으로 직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스스로 작동하는 물리적 법칙과 보이지 않는 물질적 실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세계를 유지하는 신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세계가 오직 지각되는 관념(현상)과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지각하지 않을 때도 이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지각자인 신(God)이 항상 모든 것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버클리는 또한 과학에서의 본질주의[^12] 반대한 이유는, 과학의 역할을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현상의 예측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포퍼는 앞선 챕터에서 도구주의에 반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퍼가 도구주의의 선구자인 버클리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버클리의 결론에 동의한 것이라기보단,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보여준 파괴적인 비판 정신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 (7) 칸트의 비판과 우주론 (p351-)
^35026a
> [!quote]
>
> 그의 일생 전체를 지배했던 주제는 정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를 인식론과 [[순수 이성 비판|『순수 이성 비판』]]으로 이끈 것은 우주론의 문제였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관련된 우주의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난제에 관심을 가졌다. 우주의 시간적 시초의 유무에 관해 고찰하는 가운데 [[순수 이성 비판|『순수 이성 비판』]]의 중심 문제가 떠올랐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
> [[순수 이성 비판|『순수 이성 비판』]]의 비판 대상은 순수 이성이다. 그 책은 감각 경험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의미의 <순수한 세계>에 관한 모든 추론에 대해 비판과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 관한 순수한 추론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이율배반(Antinomy)]]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순수 이성을 공격하였다. 흄에 의해 고무된 칸트는 감각 경험의 한계가 곧 세계에 관한 모든 건전한 추리의 한계라는 점을 확립하기 위해 [[순수 이성 비판|『순수 이성 비판』]]을 기술했던 것이다.
이 챕터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즉 능동적 인식론의 기반에 대해 다룬다.
과거에는 과학자가 편견 없이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었다(귀납주의). 포퍼는 칸트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추종하진 않으나, 칸트의 생각을 빌려 이를 부정한다. 과학자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설(추측)을 세우고 실험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에게 능동적으로 질문하는 주체가 되야 하는 것이다.
>[!quote]
>실험자는 자연이 비밀을 드러낼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능동적으로 물어보아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있다. 실험자는 의문, 추측, 이론, 생각 및 영감에 비추어서 자연에 질문해야 한다. 나는 여기에 놀라운 철학적 발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을, 이론적이든 실험적인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물로 간주할 수 있게끔 해주며, 과학의 역사 또한 문학사나 예술사와 같은 차원에서 사상사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 해준다.| p362
가설과 이론이 백지상태의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감과 추측에서 먼저 탄생한다면, 과학 이론은 위대한 소설이나 미술 작품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위대한 창조물이 된다. 문학사나 예술사처럼 인간의 정신활동이 빚어낸 위대한 사상사(History of Ideas)의 일부로 격상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포퍼는 또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과학철학 뿐만 아니라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확인된다고 말한다. 그의 윤리 이론이 ==양심=인간의 도덕적인 권위==라고 진술한다는 것. 여러가지 방식으로 정식하된 이 도덕 법칙 중 둘은 다음과 같다.
>[!quote] 칸트 인용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을 창조한다. ...당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숭배하려면, 당신은 심지어 당신의 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떠한 방식으로 ... 하나님이 당신에게 알려지든지, 그리고 설사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에게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당신의 양심에 의해) 허용되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해야만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quote] 칸트 인용
>언제나 모든 사람을 그 자체 목적으로 간주하고, 단순히 그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 과감히 자유로워져라. 그리고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라.
포퍼는 이러한 윤리적 기초 위에 칸트가 국가론과 국제법 이론을 정립했다고 분석한다. 칸트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책임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을 기술한 것.
#### (8) 과학과 형이상학의 지위에 관하여 (p367-)
## Quote
> [!quote]
> 인식론자로서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관심은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이 진리가 나의 정치 사상과 일치하고 안하고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나는 경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합리주의자이며, 또한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내가 바로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다양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 p26
> [!quote]
> '무지 음모론'은, 진리를 왜곡하고 억압하며 노동자의 정신을 거짓된 이데올로기로 채우는 자본주의 저널리즘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들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물론 종교 교리이다. 나는 이런 신념을 플라톤의 삼촌인 크리티아스 Critias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였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memies)]] 8장 2절 참조
> [!quote]
> 이른바 명백한 진리라고 하는 것에는 언제나 해석, 확인, 재해석과 재확인이 필요하다. 권위자는 거의 매일같이 무엇이 명백한 진리가 될 수 있는가를 공언하고 제시해야만 한다.
> [!quote]
> 삶과 죽음, 깨어 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 청년기와 노년기, 이 모두는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회전된 전자가 후자이고 거꾸로 된 후자가 전자이기 때문이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같은 길이다. 선과 악은 동일하다. 신에게는 만물이 아름답고 선하고 의롭지만, 사람은 어떤 것은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다른 것은 의롭다고 생각한다. 참된 앎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나 특성이 아니라 신의 본성인 것이다. | p289
>[!quote]
>통상적인 물리적 사물과 물리적인 사건에는 시공 관념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 그 자체는 사물도 사건도 아니다. 그것들은 관찰조차 불가능하며, 파악하기도 힘들다. 그것들은 사물과 사건을 위한 일종의 기본틀 framework이요, 이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정신적 장비 내지는 장치의 일부다. 시공은 경험에 근거하지는 않지만 경험에 직관적으로 사용된다. 시공의 관념을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영역에 잘못 사용할 경우 우리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359
>[!quote]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관계에 관한 우리의 직관에 근거한다고 그(칸트)는 말했다. 관찰에 의해서 검증이 될지는 모르나 그것은 관찰의 소산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사고 방식, 즉 감각 소여를 배열하고, 이해하며, 그것들을 지적으로 소화하려는 시도의 소산이다. 우리의 이론을 책임져야 할 것은 감각 소여가 아니라 우리의 지성, 즉 우리 마음 mind의 소화계이다.
>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질서 및 법칙을 가지고 있는 자연은, 대체로 우리 마음의 동화 작용과 질서 부여 활동의 산물이다. 이런 견해에 관한 칸트 자신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자면, <지성은 자연으로부터 법칙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그 법칙을 부여한다>.
>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규칙성을 새겨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관찰자라는 생각을 마땅히 버려야 하며, 그 대신 감각 소여를 소화할 때 우리는 그것들에 능동적으로 지성의 질서와 법칙을 새겨넣는다는 견해를 택해야만 한다. 이 우주에는 우리 마음의 각인이 새겨져 있다. | p361-362
>[!quote]
>우리는 발견자들이다. 그리고 발견은 창조적인 예술이다. | p363
---
## Extracts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Cave)]]
-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
- [[엘렌코스(Elenc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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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포퍼의 자유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과 모든 형태의 권력과 권위에 내재된 위험에 민감한 것이 합쳐진 사상을 의미한다.
[^2]: 도구주의(Instrumentalism): 과학 이론/철학적 가설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
[^3]: 소고(小考)는 한자 그대로 '작은(小) 생각(考)'이라는 뜻. 짧게 고찰해 본 글을 의미.
[^4]: **에른스트 마흐 (Ernst Mach):**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그는 뉴턴의 절대 시공간 개념을 비판하고 관찰 가능한 경험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실증주의를 주창했으며, 저서 『역학의 발달』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영감을 준 '마흐의 원리'를 제시
[^5]: 하인리히 헤르츠 (Heinrich Hertz): 전자기학 분야의 물리학자인 그는 맥스웰의 이론을 바탕으로 전자기파의 존재를 실험을 통해 최초로 입증(1888년)하여 무선 통신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오늘날 주파수의 단위(Hz)로 그의 이름이 사용
[^6]: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수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그는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명저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통해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논리주의를 확립하고, 집합론의 치명적 모순을 지적한 '러셀의 역설'을 발견
[^7]: **필리프 프랑크 (Philipp Frank):** 물리학자이자 논리실증주의 철학자인 그는 빈 학파(Vienna Circle)의 핵심 멤버로서 현대 물리학(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철학적·경험적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했으며, 주요 저서로 『물리학의 철학』과 아인슈타인의 전기
[^8]: **리하르트 폰 미제스 (Richard von Mises):** 응용수학자이자 공기역학자인 그는 빈 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저서 『확률, 통계 및 진리』를 통해 확률을 무한히 반복되는 사건들의 상대적 빈도의 극한으로 정의하는 '확률의 빈도주의 해석'을 수학적으로 정립
[^9]: **모리츠 슐리크 (Moritz Schlick):** '빈 학파'를 창설하고 이끈 과학철학자인 그는 저서 『일반 인식론』을 통해 형이상학을 철저히 배제하고 과학적 명제의 의미를 경험적 검증 가능성에서 찾는 '논리실증주의'의 토대를 마련
[^10]: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양자역학을 개척한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행렬역학을 창안하고, 논문 「양자론적 운동학 및 역학의 직관적 내용에 대하여」를 통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여 현대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꿈
[^11]: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 아일랜드의 경험론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인 그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물질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관적 관념론(비물질주의)을 주창했으며, 대표 저서 『인간 지식의 원리론』을 통해 뉴턴 역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비판하고 근대 철학과 과학철학에 큰 족적을 남김
[^12]: 과학이 사물의 궁극적이고 숨겨진 참된 본질을 밝혀낸다는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