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reading # 시뮬라시옹(Simulation) ![cover|200](https://contents.kyobobook.co.kr/sih/fit-in/458x0/pdt/9788937416057.jpg) > [!hint] yonkim 2026-06-22T22:31:10:00+09:00 > 구매도서 > [!note] yonkim 2026-06-21T22:42:31:00+09:00 > > 사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 사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 [!note] yonkim 2026-06-21T22:43:02:00+09:00 >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브레히트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는 중이었습니다. 번역가님의 노고에는 깊이 감사드리지만서도, 솔직히 문장 마디마디를 넘어가기가 무척 고단했던 책이었습니다. 보통은 책을 읽다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155페이지 지점에서 잠시 시뮬라시옹과의 휴전을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담은 메시지만큼은 묵직하게 다가왔기에, 시뮬라시옹 50% 지점에서 제가 이해한 바를 조심스럽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선 보드리야르가 이 책을 정립하던 20세기 중후반의 유럽은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그리고 미디어 이론이 뜨겁게 교차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물의 체계》나 《소비의 사회》 같은 초기 저작을 거쳐 《시뮬라시옹》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제의식은 늘 치열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가 시뮬라크르를 설명하며 기표(말과 기호)와 기의(개념과 의미)의 연결 방식을 자주 차용하는 것을 보며, 기호학적 방법론을 참 적극적으로 고민했구나 싶었습니다. 현재까지의 가장 큰 소득은 이 책의 메시지가 매트릭스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지 워쇼스키 형제, 아니 남매, 아니 자매, 아니 2인이 그것을 할리우드식 문법으로 멋지게 은유한 것이랄까요.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엔 애석하게도 진짜 세계도, 빨간 약도 없습니다. 배후에 진짜 세계가 없으니 빨간 약을 먹더라도 도달할 곳이 없는 것이죠. 시뮬라시옹은 우리 정신에 투사되는 가짜 세계라기보다는, 진짜가 증발해버린 위에 주입된 기호들이 하이퍼리얼리티를 무한히 증식해 나가는 여전히 진짜인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결국 기호를 쫓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정리한 핵심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관계 (2) 실재가 소멸해 가는 과정 (3) 최종적 상태인 파생실재(Hyperreality) > [!quote] 시뮬라크르 >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대상(Referent)은 소멸되어버린다. 곧이어 사라진 지시대상들이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됨에 의해서 시뮬라시옹은 더욱 강화된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보드리야르가 책을 통해 일관되게 건네는 말은, 우리는 실재하는 본질인 것이 아닌 자본주의와 미디어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지배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들은 원본인 대상을 모방하거나 본뜬 복제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기호들에 가깝습니다. 배후에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기호 자체를 현실로 믿고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미지들의 정체, 즉,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파생실재에 우리의 일상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눈앞에 사과가 있습니다. 화가가 그것을 보고 똑같이 그림을 그립니다. 여기서 사과는 실재하는 지시대상(referent)이고, 그림은 그것을 모방한 복제품(copy)입니다. 사과 그림은 배후에 진짜 사과라는 원본(original)이 존재하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던 종속적인 존재인 셈입니다. 여기서 그림 속 사과는 고전적인 의미의 시뮬라크르입니다. 반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현대의 시뮬라크르는 이미지가 먼저 있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사과가 있어서 이미지가 생기는 게 아니라, 이미지가 먼저 존재하고 원본인 진짜 사과는 어쩐지 사라진 상태입니다. 배후에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라는 이 도치는 어딘가 이상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집니다. 저 역시 이 대목을 이해할 때 꽤나 애를 먹었는데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감각하는 이미지의 배후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역설적으로 그 이미지 자체를 유일한 실재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과의 맛이나 텍스처가 어떠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사과의 이미지와 기호만으로 사과를 인식하더라도 실재가 부재한다는 사실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와 미디어 시스템이 결합해 작동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호와 이미지들이 무한히 생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뜯고 있는 이 바삭한 치킨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치킨의 원형은 진작 증발했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것은 금요일 밤 치유의 아이콘이자 바삭한 치팅데이, 축제의 필수품이란 독자적 기호들이 서로를 참조하고 증식하며 연출한 하이퍼리얼리치킨의 축제입니다. 시대와 시스템과 미디어가 결합해 만든 치킨의 기호가 치킨의 본질이 된 치킨입니다. 치킨의 기호는 돌잡이 떡을 대신할 수도, 결혼식장의 웨딩케이크를 대신할 수도, 장례식장의 육개장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원형이 증발한 자리에서 기호는 무한히 재생산 될 수 있으니까요. 즉, 우리는 '이것이 진짜 치킨인가?'를 따져 묻기보다는 '오늘의 치킨은 오늘의 치킨적 기호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만으로 기호의 닭다리를 뜯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본을 잃어버린 기호들이 서로를 참조하며 구축하는 실재를 파생실재(Hyperreality)라 말하며, 우리는 그것이 인위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 통제망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쩐지 조금 무서워지는데요. 저자는 이 과정이 환유의 원칙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합니다. 환유란,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하거나 인과관계를 거꾸로 뒤바꾸는 수사학적 기법입니다. 제 나름대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한 지붕 아래에서" 라는 문장에서 지붕은 집이라는 구조물의 일부분이지만 주거 상태로써의 집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영위하는 삶과 사람이라는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때 지붕이라는 기표는 집이라는 실재적 본질을 우선 반영하고, 추상적인 코드까지 확장된 상태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기호학이 작동하던 평화로운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자본주의가 개입하게 되면 부동산, 자산, 투자와 계급이라는 새로운 코드가 주입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의미의 집은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고급 브랜드 아파트, SNS 감성 인테리어라는 기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것이 '삶' 이라는 코드로 인위적으로 부활하는 것이죠. 즉, 본질의 결핍이 시뮬라크르를 고안해내는 셈입니다. 이제 기호들은 서로를 참조하며 돌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이를 시뮬라크르들의 세차(précession[프레쎄씨옹])라 칭했더군요. 하지만 어쩐지 한국어 번역에서는 'precession' 을 천체가 돌 때의 '자전(rotation)' 이라고 적어놓은 탓에, 맥락상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키피디아와 프랑스어 사전을 아니 뒤질 수 없었는데요. 사전적 의미를 알아본 결과, 물체의 회전축이 도는 운동인 세차운동(歲差運動)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차운동은 물체가 고정된 중심 축을 기준으로 제자리에서 도는 모습이 아닌, 마치 쓰러지기 직전의 팽이처럼 축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원뿔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돌고 있는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자전과 세차는 엄밀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니 이 부분은 오역이 아닐까란 의견입니다. 불어의 précession은 '앞서감' 이라는 뜻의 라틴어 praecessio 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보다 앞서는 행위", 즉 선행(先行)입니다. 동시에 세차를 의미하는 이유를 마저 알아내기 위해 기원전 2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를 무덤에서 끌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히파르코스가 기원전 2세기의 밤하늘을 관찰하다보니, 어쩐지 '매년 태양이 춘분점에 도달하는 시기가 항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앞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상에는 '분점의 선행(precession of the equinoxes)' 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해(歲)가 바뀔 때마다 기준점의 차이(差)가 생겨서 누적된다"고 하여 세차(歲差)라고 부릅니다. 두 문화권은 서로 교류 없이 독립적으로 이 현상을 발견했다고 하는군요. 즉, 프레쎄시옹은 지금으로부터 약 2,150년 전, 세차는 약 1,680년 전입니다. 자, 히파르코스를 도로 무덤에 모셔놓고 다시 책의 첫 장으로 돌아오면, 보드리야르가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을 예시로 드는 파트가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지도 제작자들이 등장하는데, 제국의 영토를 아주 정밀하게 묘사한 나머지, 결국 지도가 영토 전체를 완벽하게 덮어버리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지요. « Le territoire ne précède plus la carte ni ne lui survit. C'est désormais la carte qui précède le territoire – précession des simulacres –, c'est elle qui engendre le territoire... » 이제 영토는 지도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으며, 지도보다 오래 살아남지도 못합니다. 이제는 도리어 지도가 영토보다 앞서가니 — 이것이 바로 시뮬라크르들의 세차입니다 —, 지도가 영토를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참고로, 이 챕터의 제목도 시뮬라크르의 세차[précession des simulacres] 입니다. 맥락상 보드리야르는 "기호가 실재를 선행하는 시뮬라크르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 보르헤스의 예시를 들고, 세차란 표현을 쓴 것인데 한국어로는 어쩐지 [시뮬라크르의 자전自轉]으로 번역되어 있더군요. 번역을 바로잡고 나니, 다시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해보면, 전통적인 세상에서는 실재가 중심축 역할을 하고 그것을 본뜬 이미지나 기호가 뒤따라가는 정상적인 궤도를 그리지만, 중심축이 무너지면 실재의 권리와 형식만을 취한 기호들이 실재보다 먼저 인간의 의식에 도착해 버리는 도치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quote] **본문중** >예상치 않았던 뒤틀림에 의하여 사회의 죽음으로부터 사회주의가 솟아날 것이다. 마치 신의 죽음으로부터 종교들이 솟아나듯이. 끝없이 지속될 시뮬라시옹이다. 배후에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기호들이 다시금 현실 전체를 환유하도록 강화될 때, 최종적인 시뮬라크르의 단계인 파생실재(Hyperreality)의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파생실재는 어떤 실재와도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독자적인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재각인됩니다. 각인된 대중은 다시 자본주의 시스템에 스스로를 귀속시키며, 결과적으로 시뮬라시옹의 통제망이 유지된다는 거죠. 이것이 지시대상이 소멸한 뒤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된 이미지로 체제를 공고히 하는 시뮬라시옹의 매커니즘입니다. 이를 두고 역자는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를 하기>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리하면 시뮬라시옹은 실재로부터 무언가를 모사하여 그럴듯한 가상의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유희가 아닙니다. 실재를 살해하고 독자적인 실재를 내세우는 완전범죄의 알리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최신 기술과 디지털 미디어가 결합된 현대 사회의 시뮬라시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조작적 실재를 무한히 재생산하고 유통하는 거대한 매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 ## 시뮬라크르의 층위 (작성중) 외면에 나타난 흐름과 관의 질서와 완전히 동질적인 제3의 시뮬라크르르 ## (3) 최종적 상태인 파생실재(Hyperreality) (작성중) ## 함열과 저지 (작성중) - 보부르 Beaubourg는 공허를 만드는 공간이다. 약간은 원자력 발전소처럼 말이다. - 대상들의 외면적 기능 뒤에서, 틀림없이 이 대상들의 진짜 깊이 감추어진 기능을 구성하는, 그 지역에 대한 일종의 중화, 저지의 힘이 방사된다. 진짜 기능이란 이제는 더 이상 결코 외면적 기능핵이 아닌 기능핵들의 파생실재성이다. - 핵위협 시뮬라시옹의 그늘과 평화공존의 그늘 아래서 세계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모델과 동일한 것이다. - 유동적이고 불안하게 변하며 차갑고 현대적인 외부와 낡은 가치들 위에서 수축경련하는 내부 - 모든 것은 이미 철 지난 혼수상태에 있고, 모든 것은 활기를 원하며, 모든 것은 재생의 활기일 따름이며, 이 같은 것은 바로 문화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119 >문명화된 사회 어디서고 대상들의 저장은 인간들의 저장이라는 부차적 과정을 유발한다. 줄서기, 기다리기, 막히기, 집중, 캠프. 이게 바로 대중덩어리 생산이다. 모든 사회성의 최종 생산물로서(역주:다름이 사라져 버린 미분화의 대중덩어리들 속에서는 사회적인 것이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는 단숨에 이 사회성이라는 것에 종말을 가해 버리는 대중덩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하는 이 대중덩어리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는 장소이다. 대중덩어리는 그곳으로 모든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려 오는, 그래서 끊기지 않는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서 그곳으로 삼켜져 버리는 더욱더 촘촘한 영역이다. - 대중들의 자동적인 밀집과 같은 문화의 자동적인 달라붙기. - 만약 대상의 저장이 인간들의 저장을 유인한다면, 대상 저장에 잠재한 격렬함이 거꾸로 인간들의 격렬함을 유발한다. 저장이란 무엇이든지 격렬하다. 그래서 어떤 인간들의 덩어리에도 그것이 함열한다는 점에서 특수한 격렬함이 있다. - 아인슈타인은 어떤 무감각 지시물에 의하여 일반 지시물의 효과가 지워지는 효과를 국지적 상대성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대중덩어리의 인력이 무감각 지시물로 작용할 때 일어나는 문화제거 효과를 말한다. >[!quote] **p133** > >전복과 격렬한 파괴는 생산의 양식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물망의 조합과 흐름의 세계에는 회귀와 함열이 대답한다. >오늘날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본뜨기나 복제라는 단계를 거치지도 않고 곧장 발생학적인 극소화된 단계를 거친다. 재현이란 끝났고, 여기서도 역시, 어느 특정한 누구의 기억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극소로 존재조차 하지 않는 어떤 기억 속으로 모든 공간이 함열한다. 수천 년 동안의 에너지 방사와 폭발국면으로부터 함열국면으로 넘어가면, 일종의 극대방사 이후에 사회적인 것이 회귀의 국면에 이르면 일단 포화점에 이른 어떤 영역의 거대한 회귀, 다른 것으로 된다. 일단 그들의 방사 에너지가 사라져 버리면 별적인 방사 시스템은 더 이상 존재를 중단한다. 이 시스템은 처음에는 느릿하게, 그리고는 가속된 진행에 따라 함열한다. 그것은 환상적인 속도로 수축하여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내부로 함몰하는 시스템이 되고 결국은 블랙홀이 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에너지의 무한한 잠재와 방사로 이해한, 의미의 세계가 사라져 버린다. p136 - (거대시장 안에서) 대상들은 더이상 상품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해독하고 그 의미와 메시지를 익힐 기호조차도 아니다. 그들은 테스트이고,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들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대답하도록 소환되며, 대답은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대중매체들의 모든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게 작용한다. 정보도 의사소통도 아니고, 국민투표, 영구적으로 고정된 테스트, 순환적인 대답, 코드의 확인이다. 원근적인 시야도 시선이 멀리 사라질 위험이 있는 소실선도 없이, 광고판과 끝없이 진열된 생산품들 만이 등가적이면서 연속적인 기호들로써 작용하는 통째로의 화면일 뿐이다. --- ## 영화 《매트릭스》 와의 관계 《시뮬라시옹》은 영화 《매트릭스》의 강력한 모티브가 된 책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보드리야르 자신은 《매트릭스》는 자신의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 영화가 자신의 이론을 연관시키는 것은 오독의 결과라고 주장했다.(source: [Wikipedia](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E%AC%EB%9D%BC%EC%8B%9C%EC%98%B9)) 영화를 통해 책을 접하게 되었지만, 책을 읽고 나니 그 비판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시뮬라크르는 복제도, 비현실도, 가상현실도 아니다. 오독이라는 비판은, 아마도 《매트릭스》가 전형적 헐리우드식 액션 블록버스터의 문법 안에서 저항의 이미지를 유희화했기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매트릭스》 에는 빨간 약을 먹고 돌아갈 진짜 현실이 있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돌아갈 원본이 소멸하여 증발한 상태이다. 시뮬라크르는 비현실이 아니며, 더이상 실재와 교환되어지지 않는다. 기호가 기호를 참조하는 끝없는 자전과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환되어진다. 즉, 시뮬라시옹은 《매트릭스》와 같이 진실을 가리는 거짓세계가 아니라, 진실과 거짓, 실재와 가상의 구별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부로 **함열**[^1]해 버린 상태를 말한다. 오히려 보드리야르가 구체적인 시뮬라크르 모델의 예시를 든 건 디즈니랜드이다. > [!quote] > 디즈니랜드는 모든 종류의 얽히고 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 환상과 공상의 유희. 당신은 밖에다는 주차를 한 다음 안에서는 줄을 서며, 출구에서는 완전히 버림받는다. 안에서는 모든 잡동사니들의 나열이 유도된 흐름 속의 군중들을 전자기화시키고, 외부에서는 고독이 오직 하나의 잡동사니인 자동차로 유도되어 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다(마치 감옥이 사회 전체가 그 평범한 어디서고 감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거기 있는 것과 약간은 유사하게). 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기계이다. 그로부터 이 상상 세계의 허약함과 유치한 백치성이 나온다. 이 세계가 어린애 티를 내려 하는 이유는, 어른들이란 다른 곳, 즉 <실제의> 세상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정한 유치함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이며. --- ## Quote > [!quote] **p09** > > 예전에는 시뮬라시옹의 가장 좋은 비유로서, 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극도로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서 결국은 지도가 제국의 전영토를 거의 정확히 덮어버리고 만다는 보르헤스의 우화를 들 수 있다. [[알레프|Source: 알레프Aleph]] > > 가장 쉽게는 우리가 사뮬라크르를 생각할 때, 현재의 전쟁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사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 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치도 않게 되어버렸다. 결국 사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이 사뮬라크르는 아울러 어떤 기왕의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 시뮬라시옹은 사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사뮬라크르를 하기> 이다. [역주] >[!quote] **p16-19** > >사라져버린 것은 모든 형이상학이다. 더 이상 존재와 그 외양을 나누던, 실재와 그 개념을 나누던 거울이 없다. 실재는 무한정 재생산될 수 있다. 실재는 이제는 조작적일 뿐이다. >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열리고 모든 지시대상(Referent)은 소멸되어버린다. 곧이어 사라진 지시대상들이 기호 체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부활됨에 의해서 시뮬라시옹은 더욱 강화된다. >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하는 것이다. 사뮬라크르하기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이다. 전자는 있음에 속하고 후자는 없음에 관계된다. >[!quote] **p26-27** > >사뮬라크르는 등가 원칙의 유토피아를 거꾸로 하여 가치로서의 기호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부터, 모든 지시의 사형집행으로서의 기호로부터, 지시가 죽은 후 이 지시가 가진 권리를 획득한 기호로부터 출발한다. 재현이 시뮬라시옹을 그릇된 재현으로 해석하고 이를 흡수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축조물 자체를 송두리째 사뮬라크르로서 감싸버린다. >[!quote] p27 >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기자신의 순수한 사뮬라크르이다. >[!quote] **p34** > >사회 전체가 광기에 젖어 있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을 따로 떼어 미친 사람의 표준을 삼아야 한다. 광기의 범주를 만들어 이것만이 미친 것이고 미친 것은 사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가장하기 위하여 광기의 모델을 생산한다. 그들에 비추어 다른 사람들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광기가 사라지게 되면 광기의 실재성이 없으므로 사회는 실제 광기의 시뮬라크르를 생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사회는 쉬지 않고 광기를 규정하고 흡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광기란 그 사회가 감추고 있는 다른 모습일 따름이다. 따라서 한 사회는 자신이 내건 광기의 거울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역주] >[!quote] **p37** > >우리에게는 우리의 종말을 보장해 줄 어떤 가시적인 과거, 눈에 보이는 지속, 근원에 대한 눈에 보이는 신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거기에 대해 전혀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quote] > ==기호의 빗장이 의미의 습관적인 부유선 아래로 내려올 때는 의미 과다의 즐거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호는 실체인 의미를 전달함에 있어서 다소간 추상화시키고 일반화시켜 의미인 대상을 근사하게 환기하는 데 그친다. 이것이 기호의 습관적인 부유선이다. 그런데 기호라고 할 수 있는 TV 방영 이미지가 실재와 똑같이 됨으로써 습관적인 부유선 아래까지 깊숙이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렇게 기호가 그가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아지게 되면 기호의 환기적 역할은 사라져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의미의 과도한 투명성은 오히려 의미 그 자체를 삼킨다. 기호가 지시대상 그 자체가 되는 선에서는 기호는 기호가 아니다. 기호는 즉 사물이 된다. 기호의 사물화는 프루스트, 브르통, 조앙 미로 등이 때때로 시도하였던 기호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 > [!quote] > <더 이상 당신이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는 것은 거꾸로 TV이다.> > [!quote] > 인위적 기호망은 실제 요소들과 뗄 수 없이 섞인다. 한마디로, 당신은 원치 않게 즉시 실재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실재의 기능들 중 하나는 틀림없이 모든 시뮬라크르적 시도를 삼켜서, 모든 것을 실재로 만드는 것이다.실제적인 것만을 보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떤 질서의 무게는 이렇게 시뮬라시옹 과정의 분리 불가능 속에서 보아야 한다. >[!quote] **p29** > >이렇듯 모든 과학은 그의 앎 속에서 그의 대상이 사라지고, 이 죽은 대상은 다시 되돌아와 그에게 잔혹한 책임 전가를 하는 역설적인 비탈면 위에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오르페에 그 유리디스처럼 과학은 항상 너무 일찍 뒤돌아보고, 그 대상은 동시에 지옥으로 다시 떨어진다. >[!quote] **p121** >보부르효과: 함열과 저지, 우리시대가 더 이상 지속의 시대가 아님을, 우리의 유일한 시간성은 가속된 순환과 재순환의 시간성임을, 유동체회로와 그 통과의 시간성임을 터놓고 선언한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유일한 문화는, 탄화수소와 석유 정제와 석유분해 증류의 그것으로서, 문화분자들을 잘게 부숴 그들을 종합적 산물로 재결합한다. 이것을 보부르-박물관은 감추려 하나, 보부르-뼈대물은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이 뼈대물의 심층적인 미를 이루는 것이고 내부공간들이 실패하도록 하는것이다. 아무튼, <문화적 생산>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모든 문화에 반하는 것이다. >Jean Dubuffet(1901-1985)[^2] >Jean Tinguely(1925)[^3] >[!quote] **p123** > >안과 바깥이라는 위상적 구별이 더 이상 제기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 뫼비우스의 진실, 틀림없이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이다. 그럼에도 보부르는, 그 모든 내용물들이 의미 거역적이고 미리 그 외적 용기에 의하여 제거되어 버림에 따라, 이 유토피아가 옳다 한다. 그래도, 그래도 보부르 속에 뭔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미로적인 것, 무한히 조합적인 도서관, 도박이나 복권에 의해 운명을 아무렇게나 재배치하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보르헤스의 소설 세계, 또는 여전히 순환적인 잔해들, 서로가 서로에 의해 꿈꾸어지던 개인들의 감속 사슬연결 말이다. >[!quote] **p125** > >그리고 대중들은 그곳(보부르)으로 몰려든다. 이것이 바로 보부르의 최상의 아이러니다. 대중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중략) 문화에 군침을 흘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근본적으로는 항상 경멸하고 싫어하였던 이 문화의 이 거대한 장례에 대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 >단순히 그들의 무게가 이 건물을 위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입, 호기심이 이 흥분의 문화내용물 자체를 제거한다. 이러한 rush는 더 이상 문화적 목적으로 제시된 것과는 어떠한 공통의 척도가 없다. 이것은 그 과도함과 성공 자체 속에서, 이 목적의 근본적인 부정이다. 따라서 이 비극적 구조 속에서 비극 요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대중들이다. 대중 자신들이 대중문화에 종말을 가한다. > >대중은 참석과 조작을 너무 잘해서 사람들이 이 작업에 준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고 구조물의 하부구조 자체를 위험하게 한다. 문화적 시뮬라시옹에 대한 대답으로 이와 같은 일종의 뒤틀린 개작이, 파생 시뮬라시옹이, 문화의 임대된 가축에 불과했었던 대중들을 (중략) 이 문화의 사형집행인으로 변모시킨다. > >보부르라는 기념비적 블랙홀 > >문화에 종말을 가하고자 하는 모든 지각 있는 작업은 이 문화를 다시 부활시킬 따름이다. > >문명화된 사회 어디서고 대상들의 저장은 인간들의 저장이라는 부차적 과정을 유발한다. 줄서기, 기다리기, 막히기, 집중, 캠프. 이게 바로 대중덩어리 생산이다. 모든 사회성의 최종 생산물로서(역주:다름이 사라져 버린 미분화의 대중덩어리들 속에서는 사회적인 것이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는 단숨에 이 사회성이라는 것에 종말을 가해 버리는 대중덩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하는 이 대중덩어리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는 장소이다. 대중덩어리는 그곳으로 모든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려 오는, 그래서 끊기지 않는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서 그곳으로 삼켜져 버리는 더욱더 촘촘한 영역이다. >[!quote] **p131** > >사람들은 만지러 온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전에 만졌듯이 바라본다. >[!quote] **p133** > >전복과 격렬한 파괴는 생산의 양식에 호응하는 것이다. 그물망의 조합과 흐름의 세계에는 회귀와 함열이 대답한다. >오늘날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본뜨기나 복제라는 단계를 거치지도 않고 곧장 발생학적인 극소화된 단계를 거친다. 재현이란 끝났고, 여기서도 역시, 어느 특정한 누구의 기억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극소로 존재조차 하지 않는 어떤 기억 속으로 모든 공간이 함열한다. >[!quote] **p143** >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더욱 적은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보는 의미를(한 신호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도의 부정) 생산한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의미작용의 거친 흐름을 보충하지는 못한다. 매체를 통해서 아무리 메시지와 내용물을 재주입하여도 소용없다. 의미의 흐름과 함입은 그 재주입보다도 빨리 간다. > >혹은 정보는 의미작용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의미의 순환 밖에 있는 다른 질서에 속한 작동적인 모델이다. 순수하게 도구적인 정보영역에 대한 가정으로, 정보란 어떠한 의미적 목정성도 내포하지 않은 기술적인 중개자이다. 따라서 정보자체도 가치판단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 >혹은 반대로 정보가 의미와 의미작용의 직접적인 파괴자 혹은 중화자인 정도에 따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의미의 흐름은 정보, 매체, 대중매체의 용해적이고 저지적인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quote] **p144** >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에서는 어디에서든 사회화는 매체의 메시지에 노출됨으로써 측정된다. 매체들에게 불충분하게 노출된 것은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것이다. >[!quote] **p145** > >본래 정보는 의사소통을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는 것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는 의미를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어 버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과정이다. 정보는 더욱더 이러한 종류의 유령 같은 내용물, 실제가 아닌 어떤 유사한 것을 대체하여 접목하기, 의사소통의 몽유병에 의하여 침범된다. > >이는 처음이 없고 순환적인 과정, 즉 시뮬라시옹과 파생실재의 과정이다. 의사소통과 의미의 파생실재성,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실재를 폐기한다. >[!quote] **p150** > >의미 너머에는 의미의 중화와 함열로부터 유래하는 미혹이 있다. 사회적인 것의 지평 너머에는 사회적인 것의 중화와 함열로부터 기인한 대중덩어리들이 있다. > >모가디시오-스탐하임Mogadiscio-Stammheim: 매체들이란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공포 착취와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운반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전적인 모호성 속에서, 테러적인 행위에 대한 생경한 미혹을 전파하고 그들 자신들이 미혹으로 작용하는 만큼 자신들의 테러주의자들이다. 매체들은 의미와 대항의미를 운반한다.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조작하며, 아무도 이러한 진행을 통제할 수는 없다. >[!quote] **p153** > >체계의 현재 논리는 말의 극대화와 의미의 극대생산이다. 따라서 전략적 저항은 의미의 거부와 말의 거부이다. 이것이 대중들의 저항이다. 이는 체계에게 자기자신의 논리를 다시 배가하여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마치 거울처럼 의미를 흡수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과 등가이다. 오늘날 체계의 명령은 정확하게 의미와 말의 재생산과 과잉생산이다. --- >[!tip] yonkim 2026-06-25T23:30:19:00+09:00 **p74** > >러시아 형식주의자 로만 야콥슨은 이원론에 기반하여 메시지의 의사소통 이론을 내세웠다. 의사를 소통하는 데에는 여섯 개의 요소가 개입한다. | **p74** > >- 메시지의 시학적 기능 측면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이론. >- 책에서 도식화된 내용을 직접 확인할 것. > 사람들은 문제의식, 역사, 말이 결핍되 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목표는 이것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산하는 것이다. 104p > 텔레비전을 여전히 강도 높은 상상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러나 점점 덜, 왜 냐하면 더욱더 텔레비전에 의해 오염되므로) 영화에 대립시키 자. 왜냐하면 영화는 여전히 이미지이기 때문에. 즉 영화는 단순한 화면과 시각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신화이다. 복사, 환상, 거울, 꿈 등의 성격을 아직도 띠고 있는 것이다. > <텔레비전의> 이미지에는 이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 은 아무것도 환기하지 않고, 단지 화면만을 자화하고, 하나의 화면일 따름이거나, 그것조차도 아니면 사실은 당신의 머릿속 에 즉각적으로 축소된 말단부이다. 당신이 화면이고, 텔레비 전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즉 당신 머리의 모든 신경절을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서 그 속을 마치 자화된 테이프를 통과하 듯이 통과한다. 그것은 하나의 테이프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105 > TV도 역시 연쇄적 이지만 함열적인 핵반응 과정이다. TV는 사건들의 의미와 에너지를 차갑게 하고 중화시킨다. 마찬가지로 핵도, 그의 추 정적인 폭발위험, 즉 뜨거운 대재난 뒤에는 길다란 차가운 대 재난을, 저지 시스템의 보편화를 숨기고 있다. 107 > 그러나 이 연쇄반응은 결코 핵 연쇄반응이 아니고,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들의 연 쇄반응이다. 이 연쇄반응 속에서 실재의 모든 에너지는 화려 한 장관을 보이는 핵폭발 속으로가 아니라 비밀스럽고 지속적 인 함열 속으로 실제로 빨려 들어간다. 이 연쇄반응은 오늘날 우리를 현혹한 모든 폭발들보다도 훨씬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폭발은 항상 하나의 약속이고, 우리의 희망이다. 109 > 76) entropie : 열역학에서는, 한 시스템의 에너지 도수가 떨어지는 것 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크기. 한 시스템의 entropie는 그의 무 질서도를 특징짓는다. 정보통신학에서는 각 신호의 출현에 대해 사 람들이 느끼는 불확실도 77) neguentropie: 부정 entropie, neguentropie의 크기의 변화는 entropie 크기와 반대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의 법칙』을 참조하기 바람. 최현 옮김, 범우사, 1983. [역주] ## Extracts - Jean Dubuffet(1901-1985) ## Outgoing Links - [[알레프]] - [[픽션들]] - [[로쿠스 솔루스]]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Back Link [[blog/Read/추측과 논박 1,2(Conjectures and Refutations)|추측과 논박 1,2(Conjectures and Refutations)]] [^1]: 함열implosion 함열implosion은 폭발explosion과 방향이 반대인 같은 힘이다. 함열 현상은 우선 실재가 사라지고 다름이 없는 시뮬라크르로 전환되는 것이고, 이어서 시뮬라크르의 가장 대표인 기호만이 남아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이다. 그 중 가장 극단적인 함열은 아마도 컴퓨터 디스켓에서처럼 모든 실재가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디스켓으로 축약 대체되거나 정보적인 코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 상태는 그러나 전체를 이미 그 속에 담고 있다. 함열은 결코 안으로의 폭발이 아니라 비구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p42) [^2]: 장 뒤뷔페 프랑스의 화가, 디자이너, 작가. 자발적 가치를 존중하여 존재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직접적인 투영을 시도하였다. 모든 세공된 예술에 반대하고, 내적 흔적, 우발적인 것을 표현할 초현실주의적인 자동기법에 호소하였다. 간결하고도 도식화된 성향 속에서 그의 표현주의는 괴상망측하고 익살스러운 것들이 풍부하며, 기묘한 풍자적 성격을 띈다. 1952-1957년의 일련의 작품에서, 그는 긁고 새기고 문지르는 수법과 재료들을 혼용하여, 나무껍질, 피부, 광물질, 땅, 직물, 벽 등처럼 여러 가지 모습을 동시에 주려 하였다. 의도적으로 불명확하게 그려진 이러한 이미지는 여러 가지를 환기할 수 있는 힘을 그가 지시할 대상들의 모호성 자체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인식의 카테고리를 혼탁하게 하고, 문명이 보지 못했거나, 문명에 의해서는 구분되지 않을 대상과 상을 나타나게 하였다. [^3]: 장 텡글리: 스위스의 조각가, 다양한 기계 부품, 조각, 나무, 헝겊을 조립하여, 격렬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었다. 이 움직임은 때로는 기계 자체를 파괴하기까지 한다(<뉴욕에게 바치는 경의>, 1960) 이 시기에 신사실주의에 가담하여 일시적인 현상들을 창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기존질서 전복적인 정신의 소유자로,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조소적인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다다이즘(Dadaism)|다다정신]], 특히 뒤샹이나 피카비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술창작의 유희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성은 급작스럽고 삐그덕거리는, 복잡하고 둔탁한 움직임을 생산하는 것이며, 그 예상 밖의 효과는 전통적 예술개념을 거부하는 구성의 형식적 가능성과 표현적 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