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rev ┈┈┈┈┈┈┈┈┈┈ | ┈┈┈┈┈┈┈┈┈┈ Next ❯❯ | |:----------------|----------------:| | [[취향탐구-술]] | [[취향탐구-건조기]] | #취향탐구 - creation date: 2025-03-13 - author: yonkim # 취향탐구-휴식 난 늘 ‘휴식’을 거창한 무언가로 여겨왔다. 쉬기 위해 시간을 내고, 어딘가 특별한 곳을 찾아 지도를 뒤지며 지루하지 않은 활동들로 채워야 한다고. 그래서일까? 일단 달력에서 쉴 날짜를 고르고 나면, 브라우저 세 개를 번갈아가며 차편과 숙소를 예약하는 산만한 푸닥거리부터 시작하곤 했다. 이 날은 티켓이 없고, 저 날은 식당이 만석이고, 플랜 B에 플랜 C, D를 위한 버튼 클릭의 반복. 쉬는 것도 경쟁이라고, 본격적인 휴식 이전에 벌써 지친 기분이 든다. 으레 무엇이든 작정하고 하기로 하면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법. 야자수 그늘 아래 편히 누워있는 광고 모델이 내게 손짓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눕기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버튼을 눌렀을까? 잠시 궁금해진다. 많은 주말과 휴가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푹 쉰 날이 손에 꼽는다. 내가 바라던 휴식을 취했던 게 맞긴 할까. 오히려 휴식과는 거리가 먼 것들 사이에서 쉬고 있다 믿었던 날들이 더 많다.   살다 보면 정말 쉼이 절실한 날이, 차라리 미쳐버릴 것 같은 날들이 꼭 생긴다. 꼭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나야만,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뭐든 작정하고 계획할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아직 기운이 남아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방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뭘 계획하고 자시고 할 기운도 있는 것이다. 단지 어느 겨울 아침 갑자기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가까스로 샤워를 마쳤으나 미룬 빨래 탓에 마른 수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알몸으로 나오다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으면, 아, 어쩌면 오늘, 세상 온갖 불행의 타깃은 나로구나 라는 서글픈 확신이 드는 날이 있다. 발을 부여잡고 앉아 있자니 괜히 출근하기도 싫고, 지난주 낙첨되었던 로또도 생각나고, 아프기도 서럽기도 한 눈물이 찔끔 난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단 30분 만에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 된다. 그런 날은 휴식이 절실하다. 마음에 충분히 여유가 있으면 하필 오늘 난데없이 보일러가 고장 난 상황에, 발가벗은 채로 발가락을 찧은 사건에 곧장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 날이라면 연약해진 상태를 인정하고, 스스로 다독여 줄줄 알아야 한다. 연약한 마음의 조종간은 누구에게나 쉽게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거뜬히 견디던 스트레스에도 쉽게 지치고, 아무 뜻 없는 말에 다치고, 잘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불공평함과 억지스러움에 새삼 예민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어떻게 쉬어야 할까? 우선 방전될 때까지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 작정하고 떠나는 것도, 눈에 불을 켜고 검색창을 헤매는 것도 기운이 남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기운이 남더라도 그런 소모적인 휴식은 싫다면, 단지 잠깐잠깐씩, 문제로부터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쉴 수 있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마음을 집요하게 알아내기를 멈추면, 내가 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화면에서 눈을 떼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늘 밖으로만 향하던 의식을 오롯이 나를 향해 돌려놓고 가만히 있어보는 것이다. 하나둘씩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처음엔 그 적막이 어색하고 좀이 쑤시지만, 익숙해지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도 평화롭다. 고요함 속에서 새삼, 생각보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히는 문제였단 것을 깨닫게 된다. 명상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지만 아마도 이러한 순간을 찾아내는 같은 많은 방법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휴식은 어딘가에서 어렵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허락하는 순간 시작된다. 꼭 멀리 떠나야만, 특별한 계획이 있어야만 쉬는 게 아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달력을 보며 쉬는 날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된다. 브라우저 창을 넘기며 복잡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지치게 하는 것들로부터 한 걸음 멀어질 때, 마음속 야자수 그늘 아래 비로소 내가 원했던 진짜 휴식에 닿으며. --- - [[Index-Writings|Return to list]] | ❮❮ Prev ┈┈┈┈┈┈┈┈┈┈ | ┈┈┈┈┈┈┈┈┈┈ Next ❯❯ | |:----------------|----------------:| | [[취향탐구-술]] | [[취향탐구-건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