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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향탐구-가을]] |
#취향탐구
- creation date: 2024-08-10
- author: yonkim
# 취향탐구-커피
나는 만성적 결정 장애를 달고 살면서도 커피에 대해서 만큼은 상당히 확고한 취향이 있는데, 특히 고온 고압으로 신속하게 뽑아낸 강렬한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다. 일단 추출의 형태는 더블샷 에스프레소로 한정한다. 농도는 약간 묵직한 정도가 좋지만, 끈적거리진 말아야 한다.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차게 마신다면 쉐이커에 얼음을 잔뜩 담아 빠르게 식힌 형태가 좋다.(샤케라또?)
다음으로, 어떤 형태로든 우유를 첨가하지 말아야 하고, 산미가 아주 조금 있어야 한다. 산미는 '약간의 신선한 쌉싸름함' 이라는 디테일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향미. 향미는 커피의 취향을 결정하는 데 아주 빠르고도,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의 향미는 바닐라 라던지 캐러맬, 견과류 같은 따스하고 무거운 것의 비중이 높은 쪽이다. 머스크, 플로럴, 시트러스와 같이 규격화 된 명칭을 빌리자면 '앰버'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들이므로 그슬린 나무 톱밥 이라던지 시나몬, 호박과 버터 같은 것들도 일부 포함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맛보는 모든 과정에서 특정한 장면이 떠오르기까지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커피이다. 가끔 커피의 특정한 향이나 맛, 텍스처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진지함), 이런 말을 하면 마치 수상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 간증 하는 듯한 느낌이라 커피에 꽤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할 때조차 말하기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잘 표현한 애니매이션이 바로 라따뚜이다. 주인공 생쥐 레미가 치즈와 딸기를 같이 먹었을 때 느낀 새롭고도 조화로운 맛을 폭죽이 파밧- 하고 터지는 그래픽으로 표현한 장면이 그렇다. 레미는 맛을 '본 것'이다.
커피에서 무겁고 부드러운 풍미가 지배적이면 어스름 저녁에, 창 밖으로는 알록달록한 방울 전구가 반짝이고, 장작불이 은은한 벽난로 불빛과 같은 크리스마스의 무드가 그려진다. 재밌는 건, 같은 커피에 레몬 한 조각을 곁들여 에스프레소-로마노 스타일로 마시면 열대지방의 해변이 펼쳐진다.
건조하고 맵쌀한 맛이 두드러지는 커피를 아이스로 차게 식혀 한 모금 마시면, 사막의 황금빛 모래 언덕과 푸른 하늘이 만나는 선명한 풍광이 펼쳐지며 탁 트인 기분이 든다. 이런 커피는 이른 아침이나 정오에 소금기 있는 비스킷을 함께 곁들여 마시면 VR이 따로 없다.
이런 장면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낭만적인 바캉스 배경이 쉽게 그려지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커피가 지닌 매력적인 장치랄까?
온도, 향미, 연상 되는 장면 그리고 곁들이는 다과에 이르기 까지 여러가지 사항을 까다롭게 굴다 보면 "가장 좋아하는 커피" 취향이 완성 된다. 이 과정은 아메리카노냐 라떼냐라던지 아이스냐 핫이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진지한 태도가 요구되지만 고급스러운 휴식의 효과를 보장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취향을 자극하는 감각의 미세한 뉘앙스들을 잊어버리기 쉽다.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여러가지 감각의 총체적 경험이다. 커피 한 잔,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던 기능성 음료를 넘어 사소한 순간조차 취향을 채집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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