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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탐구
- `creation date: 2025-03-18`
- `author`: yonkim
# 취향탐구-건조기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부지런히 빨래를 돌렸다. 부지런히,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세탁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TV 화면을 돌리던 시간이 더 길었을지도. 리모컨을 쥐다 놓치다 하며 깜빡 졸다 보니, 빨래가 끝나있다.
빨래를 좀 밀렸더니 양이 많다. 건조기엔 일단 반만 던져 넣고, 이번엔 잠을 깨 볼 요량으로 창문도 열고 커피도 한 잔 내린다. 엊그제엔 밤새 눈이 내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따사롭다. 베란다에 아침 볕이 길어지는 동안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그런데 빨랫감이 데구륵 데구륵 구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시 멍해지는 게 애써 내린 커피에도 영 손이 가질 않는다.
창문을 열어두어 살짝 서늘해진 공기,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포근한 침대, 그리고 "위잉-데구륵"을 반복하는 건조기의 잔잔한 백색소음. 저항하기 힘든 졸음이 무섭게 밀려든다. 역시 삶은 끝없는 잠과의 싸움일까?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도로 침대로 점프.
꿈속에서 나는 볕 좋은 마른 들판에 누워 있었다. 포근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보송보송한 강아지 모양 구름, 토끼 모양 구름이 떠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다 갑자기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꿈속의 불길한 기분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는 법. 난데없이 먹구름이 등장하고, 강아지 구름이 네 발로 허둥지둥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순간, 동, 동, 빗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꼭 어디 대야에 받아 놓은 물에 떨어지는 듯 맑고 또렷한 소리. 갓 조율을 마친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를 듣다 보면…
♩ ♪ ♫
눈을 뜨니 한 시간 반이 훌쩍 흘러가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덧 조용히 멈춰 선 건조기가 기분 좋은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 맑은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너였군. 그런데, 이 노래 뭐더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소녀의 기도?" 아니, 그거 말고… 가전제품은 꼭 익숙하지만 제목은 기억 안 나는 클래식을 알림음으로 쓴다. 그냥 어디 한쪽 구석에 곡명이라도 작게 써 붙여주면 좋을 텐데.
건조기 근처로 가니 음악이 뚝 멈춘다. 마치 "어, 너 듣고 있었어?" 하는 듯한 태도다. 만약 건조기가 사람이라면, 은근히 낙천적인 아저씨일 것이다. 누구나 싫어하는 주말 근무를 서며, 빨랫감을 데구륵 굴리는 지루한 일을 반복하면서도, 일이 끝나면 혼자 흥얼거리며 나름대로 삶을 즐기는 그런 아저씨. 그리고 누군가 다가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지는, 약간은 수줍음 많은 타입.
건조기에서 갓 꺼낸 빨래는 따끈따끈 잘 말라있다. 오늘도 묵묵히 일당백을 해내고야 마는 아저씨. 일은 못하는데 노래만 흥얼거린다면 별로겠지만 일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면 전기세가 아깝지 않다.
안에 남아있던 건조기 시트를 버리려는데 아직 미세하게 향이 남아있다. 잠시 스치는 생각, '한 번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몸에 밴 절약 정신이면 좋겠지만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란 점이 애석하다.
종이처럼 납작해질 때까지 짜낸 치약이라던지, 식탁에서 시작해 현관 바닥까지 닦았던 물티슈 한 장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 걸까. 세면대 앞에서 치약을 쥐어짜느라 안간힘을 쓰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번엔 건조기 시트를 든 채 쓰레기통 앞에 우두커니 서있자니, 괜한 헛웃음이 나온다. 여전히 아침잠을 이기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에만 몰두하는 나란 인간. 다 큰 어른은 언제쯤 비로소 어른스러워지는 걸까? 건조기 시트는 일단 오늘은 버리기로 한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빨래를 개다 보면, 이 부드럽고 바삭한 감촉이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갓 말린 수건은 곧 욕실로 가서 흠뻑 젖고, 좋아하는 양말은 다시금 전쟁 같은 월요일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빨래통에 쌓여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도 결국 크고 작은 주기를 반복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움을 입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는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씻기고 말려지며 살아간다. 마치 매일이 처음인 듯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하루를 살아가듯이. 괜히 서글픈 기분이 드는데, 생각해 보니 아직 젖은 빨래가 반 남아있다. "어이! 다시 일하자고", 오늘따라 많은 빨래에 건조기는 주말 잔업 당첨이다. 남은 빨래와 새 건조기 시트를 넣고 다시 한 시간 삼십 분 큐. 데구륵, 데구륵. 한 박자 쉬고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잠 대신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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