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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이름 없는 감정에게]] | |
#종말을연습하며
- creation date: 2025-09-07
- author: yonkim
# 종말을 연습하며-9. 우산을 잃어버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나의 가방은 늘 잡다한 물건들로 북적거립니다. 지갑, 수첩, 펜, 립스틱과 립밤, 향수, 전자책, 사탕, 치실, 에어팟, 라이터, 냅킨, 선 글라스, 5종류의 커넥터가 대롱대롱 매달린 충전 케이블, 손수건, 알레르기 약에 접이식 우산까지.
지갑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여러 장(혹시 잔고가 부족하거나 카드의 마그네틱이 갑자기 고장 나 결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주민등록증과 면허증, 각종 쿠폰과 즐겨 가는 커피숍의 스탬프 적립 카드, 동전 몇 닢까지 꽉 차 있습니다. 수첩과 펜은 갑작스럽게 메모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공교롭게도 휴대폰 배터리가 부족할 수 있으니 필요합니다. 물론 펜 하나가 갑자기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펜은 2개를 챙겼습니다(게다가 펜은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으니까요).
또,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게 될 수도 있으니 무료함을 달래줄 전자책도 필요합니다. 평소 메이크업은 잘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너무 초췌해 보일 수 있으니, 채도가 옅은 립스틱 정도는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가방 속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저마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넉넉한 사이즈의 숄더백이 아닌 가방을 살 수가 없습니다. 혹시 모를 일들을 대비하는 물건을 모두 챙기려면요. 손잡이를 들어보면 물 젖은 자루처럼 축 쳐지는 묵직한 가방. 한쪽 어깨로 매는 불안의 무게입니다.
커피숍에서 급한 연락을 받습니다. 중요한 용건입니다. 어깨와 얼굴 사이에 휴대전화를 받쳐두고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집니다. 가방은 왜 급할 때만 3차원 주머니가 되는 걸까요? 전자책, 지갑, 스파게티처럼 엉킨 케이블을 들춰내고 나서야 수첩과 펜에 손이 닿습니다.
“네, 네. 날짜는 언제까지… 네, 그러시군요. 10월 안쪽으로요. 네.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필요하신 사항은…”
잘은 모르겠지만 더 급하다는 것들, 더 중요하다는 것들을 수첩에 열심히 끄적입니다. 완벽하게 메모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적지 않으면 불안하니까요.
통화를 마치고 메모를 들여다보니, 지렁이처럼 휘갈긴 글자들은 뭐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해 보입니다. 지렁이 글자를 사람 글자로 고쳐 쓰는 동안 아이스커피가 담긴 유리잔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힙니다. 흥건히 젖은 냅킨 위에서 싱거워진 커피를 반이나 남긴 채 부랴부랴 짐을 챙겨 커피숍을 나섭니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자료를 준비해 놔야겠어. 만약 이렇게 클레임이 들어온다면… 저렇게 대처를 하고, 다른 방안도 미리 마련해 놔야 해. 그리고 스케줄을 맞추려면 담당자에게도 미리 연락을 해 둬야겠어… 잠깐, 그 사람은 여름휴가를 갔던가? 육아휴직이었던가? 그렇다면 다른 담당자가 누구인지…‘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형형색색의 룰렛판처럼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눈 깜짝할 새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버스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다음을, 그리고 그다음만을 생각합니다.
생각에 몰두하느라 몇 정거장을 지나왔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벨을 누릅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까지의 기억은 필름을 뚝 끊어 잘라낸 것처럼 통째로 사라졌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습니다. 지나온 시간이야 어찌 되었건 내가 알맞은 타이밍에 잘 내렸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이대로 사무실로 돌아가 업무 노트북을 열고, 당장 시급한 것들만 집중하면 되겠죠. 운이 좋으면 퇴근 시간을 맞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뚜벅뚜벅, 목적지가 분명한 발걸음.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안대를 씌워놓은 경주마처럼 앞만 보면서 걷습니다. 달콤한 사과잼 냄새가 진동하는 갓 구운 와플 냄새를 맡았지만 어디서 파는 것이었을까요? 멍멍 짖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떻게 생긴 강아지였을까요? 주변 풍경은 알아차릴 새도 없이 휙휙 지나갑니다.
횡단보도에 멈춰 섰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하늘은 흐렸습니다. 반사적으로 우산 생각이 나더군요. 어깨에 맨 가방을 더듬어보았습니다. 팔뚝 반 만한 사이즈의 접이식 우산이 만져져야 하는데, 어딘가 허전한 것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머릿속이 일시정지 버튼처럼 멈춰 서고,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요? 우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디일까요? 정류장? 정류장에서는 가방을 만진 적이 없습니다. 버스? 버스에서는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었으니 아니겠군요. 그렇다면, 커피숍? 붉은 인조가죽 시트가 덮인 의자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나의 접이식 우산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커피숍이군요. 날이 흐린데, 비가 오면 어쩌죠? 마음속엔 이미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한줄기 한숨이 쏟아집니다.
그러고 보니 종일 거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립스틱을 바를 일이 없었습니다. 디지털 책장에 소설을 잔뜩 넣어둔 전자책은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습니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여전히 넉넉하고, 수첩에 적어 놓은 메모들을 다시금 들여다볼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챙긴 사탕은 가방 안에서 조금 녹았고, 좋아하는 커피숍은 근처도 가지 못했습니다. 하루의 다양한 감각들을 외면하면서까지 중요하다고 믿었던 일들은 이리저리 치이며 볼품없이 작아졌습니다. 하루의 상실은 이토록 이유 없이 일어납니다.
남은 것은 불안에 짓눌려 뻐근해진 나의 한쪽 어깨와 다 마시지 못한 커피, 옅은 와플냄새와 미스터리한 강아지 멍멍 소리. 그리고 밤이 되도록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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