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rev ┈┈┈┈┈┈┈┈┈┈ | ┈┈┈┈┈┈┈┈┈┈ Next ❯❯ | |:----------------|----------------:| | [[7. 문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누군가를 두고 왔다]] | [[9. 우산을 잃어버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 #종말을연습하며 - creation date: 2025-08-31 - author: yonkim --- # 종말을 연습하며-8. 이름 없는 감정에게 어릴 때 종종 사로잡혔던 것들은 분명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 분노, 공포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현실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감정들엔 이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무력한, 공허한 느낌이랄까요?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다기보다는, 오랜 시간 보살핌을 받지 못한 감정들이 그대로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외진 시골길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비쩍 곯은 들개에게도 사실 해피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요. 얼마나 사랑받던 이름이었는지는 해피만 알 것입니다. 부르는 소리에 꼬리를 붕붕 흔들거나, 반갑고 활기차게 멍 하고 짖었을까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드러누웠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게 된 이후로도 한동안은 그런 기억들로 버텼을 것입니다. 배를 곯아도, 다른 거리의 개들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차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할 때도요. 기억에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린 배를 채우고 눈을 붙일 자리에 찾다 저무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 정신없이 뛰어놀던 공놀이의 기억도 희미해집니다. 이따금씩 공을 쫓아 달리는 어느 집 강아지의 윤기 흐르는 털을 봐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슬프다기엔 너무 약하고, 그렇다고 마음이 막 들썩이지도 않는, 굳이 말하자면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이지만 돌아갈 곳이 사라진, 그런 것들 말이죠. 잔디밭을 가로질러 신나게 공을 쫓던 어린 날들은 순식간에 저물었고, 남은 날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영영 그리며 사는 삶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글 쓰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이름 없는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 자꾸만 생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쓰다 보면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일 때도 있고, 뭔가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함으로 매달릴 때도 있습니다. 글자로 옮겨진 넋두리가, 이야기가, 어딘지 모를 감정의 수렁에서 나를 탈출시켜 주리란 작은 희망을 가지고요. 하지만 쓰면 쓸수록 뼈아픈 정곡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무엇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 말이죠 - [[Index-Writings|Return to list]] | ❮❮ Prev ┈┈┈┈┈┈┈┈┈┈ | ┈┈┈┈┈┈┈┈┈┈ Next ❯❯ | |:----------------|----------------:| | [[7. 문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누군가를 두고 왔다]] | [[9. 우산을 잃어버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