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rev ┈┈┈┈┈┈┈┈┈┈ | ┈┈┈┈┈┈┈┈┈┈ Next ❯❯ | |:----------------|----------------:| | [[5. 나만 빼고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 | [[7. 문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누군가를 두고 왔다]] | #종말을연습하며 - creation date: 2025-08-17 - author: yonkim --- # 종말을 연습하며-6. 종말의 플레이리스트 주말 아침을 재생합니다. 여느 때보다 조금 느지막이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창을 열자 햇살에 데워진 공기와 함께 여름 끝물의 매미 울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오래된 배관 냄새가 나는 차가운 수돗물로 세수를 합니다. 뒤숭숭하던 꿈자리와 졸음이 함께 씻겨 나갑니다. 청소를 하며 묵은 먼지를 내보냅니다. 늦잠을 자던 고양이는 청소기가 성가신지 이리저리 도망 다니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호들갑을 떨진 않습니다. 고양이가 비워준 자리도 한 번 훑습니다. 세탁기에 빨래를 채우고, 섬유유연제와 세제를 넣습니다. 버튼을 누르니 조그만 화면에 초록색 빛으로 1시간 25분이 표시됩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미지근한 복숭아 한 알과 찐 고구마 반 개를 먹습니다. 과육이 단단하고 향이 짙은 여름 복숭아와 단 맛이 적고 퍽퍽한 밤고구마입니다. 전 날 내려둔 커피에 얼음과 물을 가득 채운 흐린 아이스커피를 곁들입니다. 고구마 한 입, 커피 한 입, 복숭아 두 조각, 커피 한 입. 오늘 아침 메뉴가 퍽 마음에 듭니다. 그릇이 금세 비워집니다. 비타민과 칼슘 알약을 삼켜 느낌 상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합니다. 커피를 한 잔 더 만들고, 지난밤 83 페이지에 멈춰 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도서관에서 빌려두었던 책입니다. "... 롱아일랜드의 느릅나무로 둘러 싸인 초등학교 벽돌 건물 안에... 붓꽃을 심어 놓은 긴 창가를 따라 줄지어진 책상들 끝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작가의 삼사십 년 전 회상이 글줄기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집니다.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교실 풍경과 나무 책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얌전히 앉아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평화로운 시절의 기억입니다. 스무 페이지 정도를 넘길 무렵, 창틀 너머로 이웃집의 소리가 들립니다. 설거지를 하며 그릇을 부딪치는 소리, 빨래를 탁탁 터는 소리, TV 채널을 돌리는 소리, 잔잔한 생활의 소음입니다. 마침 세탁기에서 경쾌한 멜로디가 납니다. 나는 책을 덮고 기지개를 한껏 켭니다. 테라스로 나가 빨래 건조대를 펼칩니다. 볕이 뜨겁고 건조하니 빨래가 잘 마를 것 같습니다. 수건과 티셔츠를 먼저 널고 남은 자리에 양말과 속옷을 걸치는 것이 익숙한 순서입니다. 빨래 바구니에서 다섯 번째 수건을 집을 무렵, 어디 먼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납니다. 프로펠러가 쉼 없이 돌며 구름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소리는 머리 꼭대기까지 가까워졌다가 다시 교회 첨탑 쪽으로 멀어집니다. 굉음이 지나간 자리엔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남습니다. 빈 빨래 바구니를 챙겨 돌아서는데, 골목이 소란스럽습니다. 테라스 난간 너머를 슬쩍 내다봅니다. 다 늘어진 민소매 셔츠에 속옷 바람을 한 아저씨가 구형 소나타 문을 열어둔 채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큰 소리로 욕을 하며 경적을 울려댑니다. 앞 건물에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층계참 창문 너머로 허둥지둥 뛰어내려오는 중년 여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구형 소나타 아저씨의 부인인 것 같습니다. 양손엔 채 지퍼를 닫지 못한 보스턴 백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녀는 그것들을 뒷좌석에 던져 넣더니 황급히 조수석에 몸을 밀어 넣습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 채로 액셀을 밟는 소리가 납니다. 잠깐 머뭇거리던 구형 소나타는 갑자기 뒤로 튕겨나가며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와장창 밀어 넘어뜨립니다. 이번엔 앞에 주차된 차를 그대로 들이받습니다. 요란한 차 경보음과 유리병이 깨지고 쓰레기봉투가 터져나가는 소리에 이웃집 문과 창문이 하나 둘 열립니다. 그러나 소나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굉음을 내며 골목을 내달리더니,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는 빨래 바구니를 허둥지둥 내려놓고 주머니로 손을 더듬었지만, 스마트폰을 거실에 두고 나온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창밖으로 몸을 내민 이웃이 다급히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사이 어디선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난 젊은 남자가 후미등이 깨진 차로 뛰어갑니다. 손에 든 차 키 버튼을 연신 눌러 대고 있었지만, 경보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별일이구나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옆 집 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평소 친하게 지내던 통장 아주머니가 뛰쳐나옵니다.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더니 다급히 붙들어 세웁니다. "아가씨, 얼른 요 앞에 초등학교로 가. 큰일 났대요 지금" "네? 무슨 일요?" "몰라요 아무튼, 지금 가야 된대. 민주야! 얼른 나와" 뒤이어 나타난 중학생 딸은 투덜거리며 무어라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주머니는 대꾸도 없이 손목을 잡아끌더니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 말입니다. 나는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식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에는 재난 문자가 연달아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볼 겨를은 없었지만,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옷장으로 달려갑니다. 마지막으로 동물병원에 데려갔을 때 이후로는 꺼낸 적 없던 고양이 이동장부터 꺼냅니다. 잠금장치가 쉽게 열리지 않아 손끝이 덜덜 떨렸습니다. “드루야, 이리 와. 얼른! 착하지… 제발.” 오늘따라 고양이가 침대 밑 깊숙이 몸을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쿵쿵 요동쳤습니다. 결국 침대를 들어내고, 도망치려는 녀석의 목덜미를 붙들어 억지로 끌어냈습니다. 발톱을 세우고 거세게 몸부림치는 녀석을 이동장에 겨우 구겨 넣습니다. 고양이가 잔뜩 할퀴어 놓은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온몸이 털을 쭈뼛 세우는 소리였습니다. 스마트폰과 이동장 손잡이를 움켜쥔 나는 더 이상 무얼 생각할 틈도 없이,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습니다. 골목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채 제대로 신지 못한 신발을 질질 끌며, 누군가는 빽빽 울어재끼는 아이를 번쩍 안은 채 앞다투어 달려 나갑니다. 하나같이 혼란스럽고 공포에 질린 얼굴입니다. 주차된 차들을 서로 빼느라 경적과 고함 소리가 뒤엉키고, 그마저도 사이렌 소리에 묻히고 있었습니다. 이동장 안의 고양이는 놀라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한 손으로는 들 수가 없어, 나는 이동장을 엉거주춤 끌어안은 채 사람들과 뒤엉켜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달렸습니다. 곳곳에서 발이 엉켜 넘어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누군가는 그대로 내리막을 데굴데굴 구르고, 뒤따르던 이들이 차례로 걸려 넘어지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정말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내며, 품 안의 이동장을 놓칠까 두려워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습니다. 초등학교 정문을 불과 백 미터쯤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귀가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터지더니 등 뒤에서 순간 뜨거운 충격이 일었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고,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 쳐졌습니다. 정신을 겨우 차렸을 때, 눈앞에는 문이 열린 채 뒹구는 고양이 이동장과 불이 붙은 채 흩날리는 파편들, 부서진 담벼락 밑에 매몰된 누군가의 팔이 보였습니다. 몸 전체가 불길에 덮인 듯 뜨거웠고,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요?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나는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는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소 가장 좋아하던 느린 재즈 곡이었습니다. 노랫말은 단 하나의 소망을 속삭였습니다. 세상을 활활 불태우기보다는, 그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피워 올리는 작은 불씨 하나면 된다고요. 내가 오래도록 꿈꾸어 온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라고요. 노랫소리가 선명해질수록 세상의 소리는 더 멀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사이렌 소리도요.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 안엔 찝찔한 선지 피가 차올랐습니다. 어느새 그렁그렁해진 눈물 너머로 연인의 모습이 일렁거렸습니다. 내년 이맘때쯤, 이 지난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 먼 섬으로 함께 떠나자고 약속하던 장면이요. 마디마디가 달콤했던 약속의 말들이 노랫소리와 함께 반복됩니다. 의식의 경계가 흐려지는 가운데,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딱 한 모금만 더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나의 팔을 거세게 붙들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세상 안에서 조용히 저물어가던 나의 의식이 퍼뜩 돌아옵니다. "재활용 말이야, 아가씨." 나의 두 발은 테라스 바닥에 온전히 붙어 있고, 양손엔 빈 빨래 바구니가 들려 있습니다. 통장 아주머니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은 없고 단지 평소와 같은 꼬장꼬장한 인상입니다. "재활용 쓰레기. 저녁에 내놔야 해. 8시 이후에. 그나저나, 저 집은 뭔 일이래?" 앞 건물의 두 남자가 주차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재활용 쓰레기를 8시 이후에 내놓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스마트폰에는 폭염 경보를 알리는 재난 문자가 몇 개 들어와 있습니다. 옷장을 열어 고양이 이동장을 확인합니다. 이동장 오른쪽의 작은 잠금버튼을 누르니 딸칵, 하고 쉽게 문이 열립니다. 고양이는 거실 바닥에 누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켭니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졌습니다. 오늘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묘하게도 마음 한편이 허전합니다. 펼쳐두었던 책을 흘깃 보니 작가는 이제 어느 4월의 이른 아침, 파란 렌터카에 친구를 태우고 옥스퍼드로 향하던 기억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층층이 나무꽃이 핀 길을 달리는 장면입니다. 층층이 나무꽃 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어 몇 번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오늘의 내가 조우했던 감정의 동요를 돌이켜봅니다. 여전히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느린 재즈 선율과, 내년 이맘때쯤 섬의 풍경, 달콤했던 목소리들이 어른거립니다. 📌bgm I Don't Want to Set the World on Fire, song by The Ink Spots [https://www.youtube.com/watch?v=6l6vqPUM_FE](https://www.youtube.com/watch?v=6l6vqPUM_FE) - [[Index-Writings|Return to list]] | ❮❮ Prev ┈┈┈┈┈┈┈┈┈┈ | ┈┈┈┈┈┈┈┈┈┈ Next ❯❯ | |:----------------|----------------:| | [[5. 나만 빼고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 | [[7. 문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누군가를 두고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