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rev ┈┈┈┈┈┈┈┈┈┈ | ┈┈┈┈┈┈┈┈┈┈ Next ❯❯ | |:----------------|----------------:| | | | #종말을연습하며 - creation date: 2025-07-13 - author: yonkim # 종말을 연습하며-1.종말의 호흡법 사무실 창문 너머의 건물이 균형을 잃고 기울어집니다. 구조물이 무너지고, 유리가 깨지고, 먼지가 피어오르고, 비상벨 소리와 비명이 도시를 가르네요. 동료들은 하던 일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비상계단으로 앞다투어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밀치고, 넘어지고, 욕하고 소리칩니다. 평소 비상대피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었던 걸까요? 나는 그런 장면을 천천히 상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에, 지금 당장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얹습니다. 일상은 빠르게 붕괴되고, 기존에 알던 질서와 가치와 상식이 모조리 재편성되는 상상을 말이죠. 이상하게도, 그럴 때 나는 숨을 쉽니다. 세상의 끝을 상상하면, 종일 뻣뻣했던 어깨와 목의 긴장이 풀어지며 생각도 느슨해집니다. 모니터 안에서 줄곧 나를 괴롭히던 이 모든 숫자와 데이터들이 비로소 의미를 잃을 것이란 사실이 마음에 위안을 줍니다. 세상이 멀쩡할수록, 그 멀쩡함에 짓눌립니다. 나만 그런가요? 멀쩡한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점점 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기능해야 하고, 반응해야 하고,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서 세상이 원하는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면서요. 사무실 복도로 나가 휴대전화를 들었습니다. 가족과 연인이 밥을 먹었는지 묻고, 펫캠으로 집에 혼자 있을 고양이를 살핍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 지금 바빠" 라던지 "야옹이, 안돼" 내지는 "어제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내가 얼마나 기분이 상했는지 알아?" 같은 말들이 내 유언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나는 자주 '마지막'이란 단어를 떠올립니다. 마지막 만남, 마지막 대화, 마지막 노을. 그렇게 생각하면 익숙했던 풍경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평범했던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나더군요. 아쉽고, 애달프고, 아름다워지며 마지막 순간에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것들만 또렷해집니다.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 내가 사는 동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뿐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이 결코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습관처럼 내일을 믿는 듯합니다. 그 믿음이 삶의 해상도를 흐리게 만드는데도요. 의미 없는 것들에 주목하는 동안 소중한 순간들의 작별을 놓치는데도요. 다시 모니터를 마주하니, 골치 아픈 거래처 차장은 올해로 무려 20년 차 베테랑이고, 창문 너머의 건물은 신축이라 균열 하나 없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굳어진 것들을 처음 혹은 마지막처럼 바라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지겨운 생산의 굴레도, 어차피 세상의 종말이 닥치면 다 끝이라는 상상이 확실한 위안을 줍니다(예의 바르게 메일을 보내며). 편안한 한숨을 휴 내쉬며, 종말의 호흡법이란 이름을 붙여봅니다. 어서 일을 마치고, 오래간만에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연습: - 끝을 상상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 거래처 차장님이 길 가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저주하지 않기 --- - [[Index-Writings|Return to list]] | ❮❮ Prev ┈┈┈┈┈┈┈┈┈┈ | ┈┈┈┈┈┈┈┈┈┈ Next ❯❯ | |:----------------|----------------:| | | |